[인문·교양] 성해방, 공동육아 운동도 아나키즘의 변형 과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콜린 워드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260쪽, 1만2000원

개념이나 용어만큼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도 드물다.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의 의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역사적 굴곡만큼이나 크게 변형되는 경우가 많다. 아나키즘도 이 같은 변형을 거친 대표적인 용어 중 하나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이끈 로베스 피에르였다. 건달, 부랑자들과 자신의 정적을 뭉뚱그려 아나키스트라 부르며 그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조셉 푸르동은 혁명사상과 무정부주의를 결합시킨 인물. 그는 자유로운 개인의 쌍무적 계약을 바탕으로 중앙권력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정부주의의 철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를 혁명적 운동과 결합시킨 사람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그는 마르크스주의 국가관을 ‘중앙집권적인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비판하고, 이에 대항해 밑으로부터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연합과 무정부를 주장했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사회주의 자체를 포함한 일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국가란 것은 국민의 이익에 반해 무력을 사용하는 정치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가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해체였다.

이 책은 나아가 이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고전적 아나키즘이 생활양식을 둘러싸고 이뤄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아나키즘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아나키즘도 과거의 반체제론이나 혁명이론이 아니라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는 ‘자발적 질서 이론’으로 규정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책은 1936년 스페인 혁명, 68 유럽 학생운동뿐 아니라 탈학교운동, 주택점거 운동, 성해방 운동, 노동자경영참여 운동, 공동육아 운동 등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일련의 자치운동도 아나키즘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같은 ‘자발적 질서이론’에 입각해 자신들의 기원을 끊임없이 끌어올린다. 앙드레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나키스트로 성공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스 시대 철학의 역설을 통렬하게 비꼰 제논,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루소, 노자와 장자는 물론이고 톨스토이나 간디, 비틀스, 롤링 스톤스도 아나키스트로 불린다.

국내에도 이 같은 아니키즘을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환경·시민운동가들도 있다.이들 환경·시민운동(http://homini.tripod.com/, http://www. anarclan.net/)은 결국 각 개인들이 국가·정당·시민사회 등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발적으로 조직화하고 연대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진정한 시민성과 참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