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과 박수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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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 정원은 신비스러웠다. 건강한 푸른 잎의 열대식물 사이사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TV 브라운관에서는 형형색색의 꽃인 양 영상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릴 적 본 부잣집의 조명 밝힌 정원 같기도 하고 우주 저 먼 곳 어느 별 나라의 정원 같기도 한 그곳을 찾아 나는 2000년 여름 한낮을 보내곤 했다.

석기와 위성시대 격차 보듯

2000년 7월 호암갤러리에서 전시된 '백남준의 세계'의 'TV 정원'에서 말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70)의 예술세계가 국내에서 영구 전시된다. 경기도는 2004년까지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미술관을 건립키로 하고 이미 전시될 작품 58점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로 자타가 공인하며 그의 미술관을 국내에 짓자는 여론과 움직임은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화되기는 처음이다.

우리 사무실 휴게실에는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복사본 한점이 걸려 있다. 화강암 재질같은 회백색 바탕 위 벌거벗은 나무 한그루가 중심을 잡고 있고 양 옆에서 한 여인네는 광주리를 이고 길 떠나고 한 여인네는 아기를 업고 그걸 바라본다. 시공(時空)이 정지된 상태에서 하염없이, 담배 한 모금 깊이 빨며 그걸 바라보고 있노라면 화가는 아무 말 없는데 그림 속에서는 속 깊은 기다림과 그리움이 '수군수군'이야기를 걸어온다.

평생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간 박수근(朴壽根·1914~65)이지만 한국의 정한(情恨)은 잘 드러내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대접받으며 그의 작품은 국내외 경매에서 호당 최고가를 경신해가고 있다. 그런 박수근이 5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고 그 기념으로 17일부터 5월 19일까지 '한국의 화가 박수근'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다.

봄날 같지 않은 이상난동에다 '중대 경보'까지 내려질 정도의 사상 최악의 황사바람에 급기야 비행기 추락까지. 권력형 부패가 꼬이고 꼬여 가닥잡기도 힘든 게이트에다 각당 대선 후보들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그야말로 사회는 물론 자연·계절까지도 어지러운 시절, 백남준과 박수근의 소식은 청량하다.

세계 최고에 값하면서도 박수근과 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는 천양지차다. 산길 물길 꽉 막힌 강원도 양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제대로 된 교육도 못받고 고학으로 그림에만 몰두했다. 가난하고 고독한 그가 찾아낸 세계는 탑과 불상이 된 화강암이요 고구려 벽화에 단순하게 갇힌 조선의 미학이었다. 반면 백남준은 서울의 부유한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중등교육 후 5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 미학과를 마치고 다시 독일·미국 등지에서 최고의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그 맨 앞에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수근이 조선 촌사람이요 석기시대인이라면 백남준은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위성시대를 살고 있다. 때문인지 박수근의 그림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피 속으로 와닿는 반면 백남준의 작품은 낯설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사실 여자의 몸을 현악기 삼아 연주하는 퍼포먼스나 서울올림픽을 기해 만들어져 위생생방송으로 진행된 작품을 TV를 통해 바라보면서 그런 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예술은 인간의 심성 지켜야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기성 제도와 문화에 갇힌 인간을 우주 가득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머뭄과 떠남, 지킴과 타파, 요즘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그 극단에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고픈 박수근과 백남준은 서 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 양단을 같은 값으로 조화롭게 승화시켜, 결국 편안하게 인간의 심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예술이다. 이런 예술의 속성 때문에 이 어지러운 시절, 백남준과 박수근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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