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빈곤화 방치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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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내 명문고등학교의 해외 유학반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외국 명문대학에 진학했다는 보도를 이제 드물지 않게 본다. 최근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우수한 수학영재도 자신의 꿈을 펴기 위해 이 땅에서의 의사 공부를 포기하고 미국 명문대학으로 떠났다.

돈만 낭비한 'BK 21'사업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면서 이런 학생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땅의 우수한 젊은이여, 너희들의 꿈을 펴기 위해서는 이 땅을 떠나라. 그 길이 너희들을 위해서도 좋고,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

명색이 이 나라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런 태도가 한국 교수의 정체성(identity)에 부합하는 것일까 하고 수많은 시간 되풀이 자문해보았으나 결국 '나는 이 땅에서 교육개혁과 대학개혁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겠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학생들을 이 땅에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미 이 나라 교육이 붕괴된 것은 학부모들이 더 잘 안다. 너나 할 것 없이 생활고에 쪼들리면서도 자녀를 외국 유학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이 나라 교육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2세 교육을 타국의 손에 맡기는 나라는 조국의 자격이 없다. 이런 비극 속에서 나는 이 땅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서글픈 성원을 보낸다. 속수무책으로.

그동안 법학교육과 대학교육의 개혁에도 여러 차례 참여해 애써 보았지만 이 나라에서 논의가 돌아가는 상황은 절망하기에 딱 알맞다. 1995년 우리가 먼저 사법개혁과 로스쿨 도입을 내놓고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일본은 총리가 추진위원장이 되고 전 각료들이 참여한 상태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법개혁과 로스쿨 도입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다. 대학개혁을 한답시고 1조4천억원을 들여 붓고 있는 'BK21'사업이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처음부터 대학개혁의 방향과 방법이 틀린 상태에서 아까운 돈만 낭비하고 만 것이다. 돈은 돈대로 없어져 가고 대학의 빈곤화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새로운 지식·정보시대에 국제적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식경쟁에서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교육과 연구가 유일한 대안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은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핑계로 가장 먼저 도서관 예산과 실험실 예산부터 줄이고, 교수의 연구환경과 학생의 공부환경을 개선하기는커녕 과장된 광고와 이미지 경쟁에만 예산을 쓰고 강의는 함량 미달 인사들의 강연으로 대체하고 있다. 연구와 교육의 질은 뒷전이고 양만 강요한다. 형편없는 여건은 문제삼지 않고 교수만 두들겨댄다. 학문연구와 교육이 장사와 다를진대 무턱대고 기업논리로 대학을 도배하고 있다. 참으로 어느 구석에도 건강성과 진지성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대학의 기능왜곡과 대학의 빈곤화만 가속시키고 있다.

대학의 빈곤화는 무엇보다 재정의 빈곤에 있다. 외국 대학과는 아예 비교할 수조차 없다. 대학재정이 빈곤한 이상 연구와 교육의 성과는 나아질 수 없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대학 기능을 왜곡하고 연구나 교육의 질, 그리고 재정에서 한국 대학들을 빈곤화의 길로 치닫게 만드는 주범이 정부라는 점이다.

통폐합·민영화 등 자율로

대학에 대한 국가통제가 대학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있다. 입시제도까지 국가가 통제해 모든 국민을 점수로 한 줄로 세우고, 대학의 재정과 운영·학생선발까지 국가가 강요하는 한 한국 대학은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정부가 교육 실패의 현실을 직시하고 늦게나마 자율형 사립고의 확대와 영재교육의 방안을 내놓은 것은 잘 한 일이나 대학에 대한 국가통제가 제거되지 않는 한 이는 성공할 수 없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국·공립대학의 예산·회계를 완전 자율화해야 한다. 사립대학에 대한 보조금을 전부 국립대학으로 돌리는 대신 사립대학에는 기여입학제를 막지 말아야 한다. 기여입학제 실시에서는 학생선발권을 대학에 돌려주는 것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국립대학은 통폐합·독립법인·민영화의 길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대학 스스로 생존에 가장 유리한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의 빈곤화, 더 이상 방치하면 정말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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