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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전쟁 60년, 전후 세대의 155마일 기행 ⑬·끝 판문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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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경기도 파주시의 ‘북한군-중국군 묘지’. 남한 땅에 묻힌 하나뿐인 북한군과 중국군 묘다. 작은 봉분 앞에 세워진 비에는 대부분 ‘무명인’이라 적혀 있다. 이름 이 표시된 묘는 휴전 이후의 것들이다. ‘1·21 사태’ ‘여수 반잠수정 침투 사건’ 등이 적혀 있는 이 비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실감케 한다.

어느덧 여행은 종착지에 이르렀다. 눈길에 묻힌 강원도 양구를 시작으로 두 계절을 건너며 남북 접경 지역을 가로질렀다. 서해로는 백령도, 동으로는 북방한계선(NLL) 인근 저도어장에 이르는 숨 가쁜 여정이었다. 두 번째 기사로 백령도 기행이 나가고 나흘 만에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했다. 여행길은 긴장되고 위태로웠다. 더러 발길을 돌려야 하는 길도 있었다. 남북의 긴장이 즉각 반영돼 시시각각 변하는 비무장지대(DMZ). 3월의 휴전선과 6월의 휴전선은 아주 다른 얼굴로 변했다.

반세기를 넘겨 더욱 고착되고 견고해진 휴전선은 그러나 실상 매우 유동적이며 가까스로 유지되는 전선이었다.

분단체제의 1번지 판문점으로 가는 길은 최근의 정세와 맞물려 더욱 긴장된다. 왠지 분단의 민얼굴을 대면할 것 같다. 지금껏 지나온 접경들의 모든 긴장이 시작되는 곳, 긴장을 억제하고 조율하는 곳, 한반도 정세와 국제 정세가 맞물린 진앙처럼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 판문점을 5㎞ 앞두고 유엔사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오른다. 회담이 열리는 날이 아닌 데도 판문점을 찾는 국내외 취재진이 많다. 천안함 사건 이후 판문점 표정을 담으려는 언론의 발길이 부쩍 잦다고 한다. 판문점을 두 번째 찾고 있다는 유럽의 한 통신사 기자는 “이곳의 긴장은 곧 세계의 긴장”이라고 전한다. 국제질서의 힘이 수렴되고 분산되는 한반도의 분단, 그 중심에 일명 ‘판문점’이라고 불리는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이 있다.

동서 800m, 남북 600m 장방형의 공간은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MDL)이 지난다. 우리 쪽 파주시와 북쪽 개성시에 속한 땅이지만 어느 쪽 행정력도 미치지 않는다. 판문점에서는 권총 외에는 중무장할 수 없다. 긴장감마저 극도로 억제해 남북이 공존한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인민군·중공군 정전협상 대표들이 2년여의 지루한 회담을 마치며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정접협정에 따라 설정된 비무장지대를 감시하고 감독할 군사정전위원회가 들어서고, 판문점 일대는 정전의 세 주체가 공동으로 경비하는 구역이 됐다.

유엔사가 관할하는 ‘평화의 집’을 통해 회담장으로 오르자 아주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북쪽 언덕에 위압적으로 선 3층 건물 판문각(板門閣)과 인민군 경비병. 경비병은 쌍안경을 들어 남쪽 방문자들을 살핀다. 남쪽 평화의 집과 북쪽 판문각 사이에 일곱 동의 콘센트 건물이 늘어서 있다. 모두 군사분계선상에 세워진 건물이다. T1·T2·T3의 일련번호를 단, 가운데를 점유한 청색 가건물 세 동은 유엔사가 관리한다. 건물 일련번호 앞에 붙은 ‘T’는 가건물을 뜻하는 ‘temporary building’의 약자다. 좌우 가장자리에 들어선 은색 콘센트 건물들은 북한 관리동이다. T1 건물과 T2 건물 사이에 높이 5㎝, 너비 50㎝로 돋워 놓은 콘크리트 단은 금단의 선 군사분계선이다. 250㎞ 군사분계선이 지도 밖으로 나와 이미지화된 곳은 이 구조물뿐이다. 판문점의 풍경은 건물의 배치와 도색까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양측 경비병은 배우들처럼 움직인다.

T2 회담장의 내부 모습. 경비병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북한, 왼쪽이 남한 지역이다.

T2 막사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군사정전위의 회담장이다. 정전 후 이 회담장에서 57년간 약 600회에 이르는 회합이 있었다. 양측은 이곳에서 서로 다투고 추궁하고 기 싸움을 벌였으며, 때로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연간 평균 19만 명의 관광객이 판문점을 찾고 있다. 북쪽도 남쪽의 절반 정도 되는 관광객이 판문점으로 안보 견학을 온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남쪽 문으로 회담장에 들어선다. 푸른 방 중앙에 10명이 앉을 수 있는 메인 테이블이 놓여 있다. 테이블 가운데로 세 개의 마이크 설비가 갖춰져 있는데 그 선 역시 군사분계선이다. 배역을 처음 맡은 배우처럼 군사분계선을 넘어 본다. 신비롭고 떨리며, 한편으로 장난스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마 북문으로 들어선 관광객도 저희 경비병을 앞세우고 조심스레 남녘 땅을 밟아 볼 것이다. 이렇듯 복잡한 심리를 동반하는 한 걸음이 지상에 또 있을까.

도끼만행 사건의 발단 미루나무 자리에 세워진 비석. 아래 원 모양 단은 실제 나무 굵기다.

애초에 공동경비구역은 양측 경비병이 자유로이 오가며 경비를 섰던 곳이다. 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으로 알려진 ‘나무 자르기 사건(Tree cutting incident)’이 일어났다. 미군 장교 2명이 희생되면서 남북 긴장은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이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도 군사분계선이 명확히 적용됐다. 상대방 구역에 있던 초소들이 폐쇄되고 분계선 후방으로 물러났다. 사건 현장의 미루나무는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있다. 그 앞으로는 갈대밭과 버드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는데 백로들이 한가롭다. 아군 4초소 앞에는 포로 교환이 이뤄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워낙 재현을 잘해 놓아 전혀 낯설지 않다. 이 다리도 ‘나무 자르기 사건’ 이후 폐쇄됐다. 북이 사천(砂川)을 건너 판문점으로 출입하는 다리는 ‘72시간 다리’가 유일하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되자 북한은 72시간 만에 새 다리를 만들었다.

도라전망대는 안보관광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망원경으로 DMZ를 구경하는 안보관광객들.

그러나 판문점은 또한 서로 대화하고 평화를 궁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하다. 유례 없는 긴 휴전을 관리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판문점은 분주했다. 도라전망대로 물러나면 판문점 뒤로 남북이 함께 일군 개성공단이 보인다. 천안함 사건 후 북은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길은 닫히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울 무렵, 흰색 화물차 15대가 신1번 국도를 따라 남방한계선을 넘어왔다. 하루 스물세 번의 차량 왕래가 있다고 한다. 1000개 업체가 입주할 예정인 개성공단이 완공되려면 아직 2년이 더 남았다. 중국 관광객 루전산(路振山·71)은 2004년 북한을 통해 판문점을 찾았고, 이번 여행에는 도라전망대를 찾았다. “남쪽을 보고 싶어 왔다. 같은 민족끼리 대치한 모습에 마음이 침통하다. 중국과 대만은 같은 처지이지만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고 있다. 나도 올해 말에는 대만을 여행할 계획이다. 한국도 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길고 특별한 여행이었다. 종착지에 이른 느낌보다 기착지에서 다시 길을 나서는 느낌이 든다. 나는 물리적인 경계를 건너왔을 뿐이다. 전쟁과 분단은 시간 속에 놓여 있고, 다시 새롭게 기록될 것이다. 길에서 만나 생을 들려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전성태·소설가



59년 프라우다 특파원 첫 귀순
‘도끼만행 사건’ 후 분계선 표시

정전 57주년 판문점선 무슨 일이

요즘 판문점은 긴장감이 넘친다. 유엔사 소속 한국군 경비병은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가급적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북한군 경비병과 자칫 시선이 얽혀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판문점 방문객들이 있을 때 국군 경비병들은 주먹을 쥔 채 양팔을 약간 벌린 자세로 경계근무를 선다. 만약의 사태에 가장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자세란다. 또 취재진이나 관광객은 북한 경비병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판문점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소설가 이호철(78)씨가 1961년 발표한 단편소설 ‘판문점’에는 초창기 판문점의 어딘가 느슨하면서도 긴박한 분위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 남북회담을 취재하는 남북 기자들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남측 남성 기자가 나이 많은 북한 여기자에게 “누님 나오셋소?”라며 장난스럽게 인사하자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어이구, 여전하시구료. 노동자 농민들 피땀을 빨아서 피둥피둥해지셨군. 더 뻔뻔해지구.”

남북 기자들은 심지어 ‘체제 우월성 논쟁’도 벌였던 모양이다. 이런 분위기는 판문점의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다. 남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속하는 판문점은 원래 논밭만 있는 벌판이었다. 군사정전위원회 회담 장소로 활용하기 위한 공동경비구역이 1953년 10월 설정됐다. 동서거리 800m, 남북거리 600m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규모다. 그러나 남북한 군이 철책 없이 만나다 보니 삼엄한 경계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판문점을 통한 망명·귀순 사건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첫 사례는 59년에 발생했다. 옛 소련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평양특파원 이동준씨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 취재를 나왔다가 유엔 측 사무실로 넘어와 귀순했다. 67년 이중간첩 이수근의 탈출 과정은 한 편의 ‘냉전영화’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남측으로 넘어온다.

판문점이 얼어붙은 결정적인 계기는 76년 발생한 ‘도끼만행 사건’이다.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습격해 도끼로 살해한 이 사건으로 판문점은 사실상 공동경비 아닌 분할경비 체제로 바뀐다. 이전에는 없었던 군사분계선 표지물이 설치되고 양측은 이를 넘지 못하게 된다.

98년에는 유엔사 소속 국군 경비소대 김모 중사가 북한군과 30여 차례 불법 접촉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 3월 16일부터 연재된 베를리너판 1년 기획 ‘DMZ를 가다’ 1부는 오늘로 마칩니다. 다음주 부터 시작되는 2부에서는 DMZ의 환경·생태 문제를 다룹니다. 철책선으로 단절된 비무장지대(DMZ)이지만 야생 동식물은 어렵사리 스스로 길을 찾아 이어가고 있음을 취재팀은 발견했습니다. 민통선 지역에는 아직도 야생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돼 있는 곳이 많지만 최근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DMZ와 민통선 지역 생태계의 다양한 모습을 하나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특별취재팀 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최영기 기자
취재 협조 국방부·유엔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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