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환영의 시시각각

북한 사람은 예비 유권자·종교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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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조선 땅에서 천주교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대원군이 앓아 누운 주교에게 병문안을 가고, 신앙을 이유로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살인마’인 그를 명동성당에 초대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세월의 힘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국제정세 변화의 힘이기도 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되면서 조선도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고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 지난 17일 일어났다. 국내 5대 종단인 불교·개신교·가톨릭·원불교·천도교 소속 527명의 성직자가 기자회견을 열고 진보·보수가 망라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의 이름으로 남북 정상회담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촉구한 것이다. 아직 천안함 유족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하는 국방 개혁에 착수한 지금, 왜 이런 요구가 종교계에서 나온 것일까.

이번 성명의 동기를 종교적 입장, 인도주의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키워드는 교세(敎勢)다. 오늘날 남한에서 불교·개신교·가톨릭은 수천만, 수백만의 신자 수를 자랑하지만 해방 직후에는 교세가 수십만에 불과했다. 1926년 한국 최대의 종교는 신도수 200만을 자랑하는 천도교였다. 기독교는 35만, 불교는 20만이었다. 오늘날의 교세에 도달한 것은 국내·국제 정세가 이들 종교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종교는 정세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종교·종단은 산업화에 기여했고, 진보 쪽은 민주화에 기여했다. 동서냉전·산업화·민주화와 같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교가 교세를 키웠다. 남은 과제는 통일과 그 이후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교세는 신(神)의 섭리나 인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겠지만 세속적으로 보면 시대 환경과 정신에 잘 적응하는 종교가 흥한다. 통일에 기여하고 통일에 잘 적응하는 종교가 흥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종교는 쇠퇴할 것이다. 통일로 종교 지형이 바뀔 수 있다. 특히 통일 이후 북한은 ‘신앙의 황금 시장’이 될 것이다.

‘Adherents.com’이라는 웹사이트는 4200개 종교에 대한 신도수 통계를 모아 놓고 있다. 이 웹사이트는 주체사상을 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신도수가 세계 열 번째인 ‘종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은 무신론 국가가 아니라 주체사상을 믿는 나라다. 통일이 가까웠다는 것은 주체사상이 종교나 무신론, 불가지론으로 대체될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 이후 종교 지형은 지금 각 종교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지 모른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는 평양에 심장병원을 건설하고 있다. “남한 교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줬는가”라는 질문이 통일 이후에 제기될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통일 이후에는 종교 지형뿐만 아니라 정당 지형도 바뀔 것이다. 지금 북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비 종교인이자 예비 유권자다. 통일 이후 북한 지역 유권자들은 비슷한 질문을 남한의 정당에 할지 모른다. “한나라당·민주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줬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변기에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왕이 머리를 깎았고 왕의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가 됐다. 어리둥절히 바라보다 국권을 상실하고 우리는 괴로운 20세기를 보냈다. 통일 과정에서도 괴이한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것이다. 외줄 위에서 전쟁과 평화, 천국과 지옥을 오가더라도 놀라지 말고 철저히 대비하자.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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