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혀뒀다 데우면 그건 요리 아니다" 佛 요리사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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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최근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와인 시음회를 겸한 저녁식사 모임이 있었다. 와인도 와인이지만 프랑스에서 특별 초빙한 유명 요리사가 준비하는 메뉴라서 미식가들의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행사를 시작하기 전 주방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호텔측에서 프랑스 요리사에게 '미리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미리 만들어 두자'며 편법을 제안한 것이다.

거의 1백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의 풀 코스 식사를, 그것도 까다롭기 짝이 없는 프랑스식으로 하자니 진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요청이었다. 요리사가 발끈했다.

"음식은 재료가 생명입니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한 재료로 조리해 최적의 온도에서 제공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요리라 부르지 않습니다. 미리 만들어 두는 요리는 따로 있습니다. 그저 손님의 수가 많다는 이유로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내거나, 미리 익혀 두었다가 데워 내는 것도 나는 요리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손님을 속이는 것이니까요."

호텔측이 진행상의 이유를 들어 '미리 만들기'의 입장을 바꾸려 들지 않자 그는 단호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어조로 나무라기 시작했다.

"당신들 눈에는 이 요리들이 입에 들어가 위를 통과하는 단순한 음식물로 보입니까. 내게는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작품입니다. 한국사람은 성격이 급해 옆 테이블과 같은 속도로 요리가 제공되지 않으면 못마땅해 한다고 하지만 작품 감상도 그런 식으로 합니까. 기다릴 수 없다면 내 작품을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한 테이블씩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오는 요리를 먹으며, 자부심을 넘어 오만하게 들리기조차 하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찬 요리는 차갑게, 뜨거운 요리는 뜨겁게.'이것은 요리의 기본이 아니던가. 막 만들어진 요리를 최적의 온도에서 제공하겠다는 그의 고집은 요리사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인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요리는 역시 맛이 있었다.

엄격한 암행심사 후에 고르고 고른 레스토랑만 실어준다는 프랑스의 그 유명한 레스토랑 안내서에 그가 근무하는 레스토랑이 올라있는 것도 결코 요행이나 우연은 아니었다.

홍혜선

(푸드&와인 컨설턴트·sunnyhong2@hotmail.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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