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쥰/白南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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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창시자'니 '천재'니 하는 백마디 찬사도 소용이 없다. '백남준'을 느끼는 데는 그의 엉성한 자필 서명이 훨씬 낫다. 그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2004년까지 짓기로 한 경기도에 보내온 현판용 서명을 보면 금방 느껴진다.

글씨는 삐뚤삐뚤 제멋대로다. 미술관의 '현판'으로 쓰라며 보내온 글씨라니. 언뜻 보면 황당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중풍으로 쓰러진 고희(古稀)의 예술혼이 느껴지는 떨림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겨우 한글을 깨친 꼬마의 천진무구(天眞無垢)하고 서툰 손놀림 같기도 하다.

사실 백남준은 그 모두라고 해야 한다. 병마(病魔)까지 덮친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예술혼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70년의 풍상을 겪어오면서도 아직 해맑은 심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남다르다고 한다.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한글 서명 중 '쥰'이란 글자다. 白씨가 조국과 떨어져 혼자 뛰어넘은 반세기의 세월을 말해주는 표기다. 거부(巨富)집안에서 태어난 白씨는 19세 되던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독일을 거쳐 미국에 정착해 살며 반세기 넘게 한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일본인 아내(구보타 시게코)와 살다보니 오히려 일본말과 한자에는 익숙하다. 그러니 '준' 대신 '쥰'이라는 구시대적 표기법을 사용한 것은 당연하다. 말도 마찬가지다. 존댓말을 거의 잊어버린 그가 40년 만에 만난 스승(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반말을 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런 오랜 유랑과 격리가 그를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만든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극동의 식민지에서 자란 청년이 혈혈단신 서구 문화예술의 첨단에 뛰어들었기에 '숙명적 아방가르드(avant-garde)'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기존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고 파괴하는 문예사조가 지배하던 60년대 유럽사회. 동양적 감성과 번득이는 천재를 지닌 白씨는 서구 지식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서구의 질서를 파괴해 유명해졌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이제야 조국에서 '미술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白씨도 어지간히 반색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공간 1백평은 비워두라"고 당부했다. 노(老)예술가는 필생의 역작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덩달아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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