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내 생각은…

범죄 피해자 보호시스템 만들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우리 사회는 다양한 법과 제도를 통해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있다. 영장주의나 묵비권의 보장, 무죄추정주의 등은 국가의 형벌권으로부터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규정된 대표적인 법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형사소송법에서는 많은 범죄자보호책을 구비하고 있고 당연히 경찰이나 검찰, 법원 등의 형사사법기관은 이를 준수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폭행 피해자가 범죄자 가족으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성매매 피해자가 업주가 무서워 도망다니는 경우, 또는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 다니는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폭력특별법.성폭력특별법 또는 성매매방지법 등의 일부 특별법에서 관련 범죄의 피해자 지원책을 규정하고 있지만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와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범죄의 피해자는 범죄로 인해 신체나 재산상 침해를 입은 것은 물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두려움을 가지거나 심한 경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등의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로 인해 가정생활이나 직장, 그리고 학교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하지 못하는 일도 많고, 특히 청소년의 경우 일탈과 비행에 빠져들어 결국 범죄자가 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여중생 성폭력사건은 범죄 피해자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법 제정과 제도 정비가 매우 시급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정부가 가칭 범죄피해자지원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고, 전국 검찰에 피해자지원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피해자 지원을 위한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미국.독일 등의 경우 범죄 피해자를 돕기 위한 민간인지원단체가 경찰 등 수사기관과 연계해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1998년에 민간범죄피해자지원네트워크를 결성한 데 이어 범죄피해자등급부금지급법(犯罪被害者等給付金支給法)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경찰은 범죄 피해자 또는 유족에게 관련 범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신변보호를 위한 경찰을 파견하거나 기타 필요한 원조를 하며,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피해자 관련 정보를 지원단체에 제공해 그들이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원단체는 피해자 상담, 국가를 대상으로 한 피해자지원금 및 일상생활용품 제공 등의 구체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수사기관의 공정한 수사를 감시하는 외부적 통제장치로서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가칭 범죄피해자지원기본법에 반영됐으면 한다.

이와 같은 법과 제도 정비와 함께 수사요원들의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간혹 수사요원들이 사건의 신속한 처리나 범죄자에 대한 인권보호에 치우쳐 오히려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외부에 노출하거나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연락처를 알려줘 합의를 종용하는 행위, 사건이 법원에 기소되기도 전에 사건전말을 공개하는 행위 등은 없어져야 한다. 피해자는 보호의 객체이지 사건을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국가가 범죄로부터 시민의 안전과 프라이버시권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부담할 수도 있다.

또한 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호를 위해서는 언론의 마구잡이식 보도관행도 없어져야 한다. 시민의 알권리를 내세운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가 때로는 피해자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범죄로 인한 피해보다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나아가 시민의 알권리가 항상 개인의 프라이버시권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 피해자에 대한 주변의 의식도 좀 더 따뜻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범죄는 특정인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누구나 그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교통사고현장에서의 피해자 구조나 절도와 강도, 성추행 등을 목격한 시민의 신고 및 수사기관에서의 참고인 진술 등은 신속한 범인 검거와 함께 증거자료 확보 등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인 피해자 지원 활동은 궁극적으로는 지역사회에서 범죄를 예방하거나 감소시켜 결국 자신의 안전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그동안 형사법(刑事法)의 역사는 국가의 형벌권으로부터 범죄인을 보호하는 각종 절차와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제 범죄의 한 축에 있는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역사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매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번 밀양 사건으로 국민적 공감대는 형성됐다고 본다.

허경미 계명대 경찰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