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그러나 축하해야 할 그날 전후 한국 언론은 심각한 위기 증상을 드러냈다.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이 사실로 포장돼 보도되며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 위기가 더욱 걱정되는 이유는 어느 언론사나 기자도 이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핵심문제는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인 노무현씨가 지난해 8월 1일 기자 다섯명과 저녁을 먹으며 했다는 '동아일보 폐간'과 '메이저 신문 국유화' 발언이다.

'카더라'로 쓰는 머리기사

토요일인 4월 6일 주요 신문들은 모두 따옴표를 붙여가며 이같은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기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취재원은 크게 셋이다. 하나는 이러한 사실을 선거전략 차원에서 폭로한 이인제 후보 진영이고, 또 다른 취재원은 그러한 발언 사실을 TV 토론에서 전면적으로 부인한 노무현 후보다. 제3의 취재원은 문제의 그날 저녁 자리에 참석한 기자들 가운데 일부로 이들은 그러한 말을 "들은 것 같다"거나 비슷한 의미의 말을 들었으나 "농담이었던 것처럼 표현했다"는 방식으로 기사에 인용됐다.

이 내용을 보도한 기자들이 특정 신문의 폐간이나 언론사 국유화 발언에 대해 기사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다면 언론의 위기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 또는 그를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보도된 기사들 속에서 추려낼 수 있는 사실은 사실이라기보다 주장이나 의견으로, 모두가 하나 같이 누군가가 무엇이라고 말했다는 문장구조를 갖고 있다. 이럴 경우 이상적으로 사실이 성립하려면 당사자들이 모두 같은 내용을 말했어야 한다. 이번 경우는 그러나 당사자들의 발언내용이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되면 결국 각 당사자들이 자신의 입장대로 특정한 방향으로 발언을 했다는 행위들만이 객관적 사실로 남는다. 과연 이러한 '계산된 사실''정치적 입장이 가미된 사실' 또는 '오염된 사실'들만을 조합해 기사를 쓰는 일은 언론의 정도에 부합하는가. 어째서 한국 신문들은 스스로 당시의 세부 사실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하고 검증해 독자적인 증거를 체계적으로 확보한 뒤 기사를 쓰지 않는가.

이번 일련의 보도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더 있다. 도대체 그때 노무현씨와 저녁을 먹은 기자들은 당시 이처럼 중요한 사안을 어째서 기사화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각자의 회사에 저녁 식사에서 오간 대화 내용을 보고했는데 회사에서 보도하지 않기로 했는가. 어떻게 각기 다른 다섯개 언론사가 똑같은 행동 방침을 정했을까. 또 그때는 묻어 두기로 한 대화 내용이 어떻게 이인제씨 캠프로 전달됐는가.

기자가 정치인의 정보원 역할을 하면 독자는 그 기자가 쓰는 기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언론사가 사실을 철저하게 확인하기보다 자사의 이익을 고려해 편리하게 편집된 사실, 부분적 진실을 마치 사실의 전부인양 보도하면 언론 보도와 유언비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회가 막대한 비용과 취재의 특권을 부여하며 기자와 언론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철저한 사실의 추적이고 그를 통한 믿을 수 있는 정보의 제공이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C P 스콧은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라고 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통해 미국 언론의 가치를 한껏 높였던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조각 조각의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플로리다까지 미국 전역을 누볐다. 왜 우리의 저널리즘에는 이러한 치열한 직업정신이 자리잡지 않는가. 기자는 정치가가 아니어야 한다.신문은 정당이 아니어야 한다.

유언비어와 보도의 차이

미국의 저명한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는 정치와 언론의 관계를 다룬 글에서 "기자는 보도하는 기사가 해당 정치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철저하게 사실을 규명해 누구든 책임있는 사람은 책임을 지게 하라"고 말했다.

선거판을 뛰는 정치인의 말은 정치적 진술이지 사실이 아니다. 산술적 균형주의에 빠져 언론의 정치 보도가 정치인의 말을 검증없이 중계하는 데 그치거나 기자가 자신의 장래를 위해 특정 후보의 홍보전략에 기여하려 한다면 언론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은 암울해진다.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신문의 날 우리 언론의 보도관행을 돌아보게 하는 오래된 서양의 잠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