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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식사 즐기며 손자와도 이야기, 가족을 이어주는 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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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 22면

김용환(맨 오른쪽) 한나라당 상임고문이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 메리어트호텔 브런치 식당 ‘JW’s 그릴’ 에서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고르고 있다. 바로 뒤편으로 검은 원피스 차림의 둘째 며느리 승지민씨가 보인다. 맨 왼쪽은 장남인 김기주 건양대 교수. 신동연 기자

일요일인 지난 13일 낮 12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 메리어트호텔 2층 ‘JW’s그릴’에 재무장관을 지낸 김용환(79) 한나라당 고문과 부인 나춘구(72)씨가 들어섰다. 부부가 미리 예약한 룸에 들어가 앉자 큰아들(김기주 건양대 교수) 가족과 작은 아들(김기영 ㈜타운캐스트 이사) 가족 7명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족 3대가 모여 브런치를 먹는 자리였다. 김 전 장관은 “원래 아들·손자·며느리 다 합치면 8명인데 둘째 아들의 고2 딸이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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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따로 사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들면서 그동안 벌어진 에피소드와 신상의 변동 등에 대해 격식 없이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세대 간 소통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격식을 갖춘 식사보다는 뷔페 스타일을 선호한단다. 분량도, 메뉴도 각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이날 브런치도 뷔페 스타일이었다.

가족 3대의 브런치 타임은 김 전 장관 부부가 일어나 뷔페로 가면서 시작됐다. 가벼운 야채로부터 새우와 장어, 스테이크 순으로 집었다. 여러 가지 음식 중에서 먹을 것을 골라 접시에 담는 모습이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았다. 반주로는 상큼한 맛의 샴페인이 올라왔다.가져온 음식을 먹던 할아버지가 중2인 손자 태호(기주씨 둘째 아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태호야. 너 커서 돈 많이 벌면 아버지 차 사 준다고 했다며? 전번에 할아버지 차를 먼저 사준다고 약속했잖아. 잊어먹었냐?”
“네에?”
태호가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작은 아빠가 끼어들었다.
“작은 아빠한테는 차 안 사줘?”
“왜요?”
태호는 자기가 차를 왜 사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돈 많이 벌면 작은 아빠 것도 사 드려야지. 하여튼 할아버지는 스포츠 카가 좋다잉.”
태호가 ‘큰일났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김용환 상임고문 부부와 아들 손자 며느리 등 3대 가족 9명이 브런치에 앞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3인 손자 지호(기영씨 아들)군은 서울국제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내밀었다. 스페인어·기술·밴드활동(플루트) 등 전 과목 모두 A였다.
“지호, 잘했어. 자, 악수.”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지호를 격려했다.
브런치는 가벼운 대화로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12일 저녁 한국 대표팀이 승리한 월드컵 축구 그리스전으로 이어졌다.

김 전 장관은 “박지성 선수가 지그재그로 공을 30m나 몰고가 골인시켰는데 환상적이더라. 그는 캡틴이니까 그렇다 해도 수비수인 이정수가 코너킥 받아 찬 건 장한 일이야”라고 했다. 둘째 며느리 승지민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포슬린 페인팅 작가다. 승씨는 매년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을 춘천 ‘마리아의 집’에 기부한다. 김 전 장관은 “나도 그곳에 간 적이 있다”고 관심을 표시했다. 이어 거기에 얼마나 기부했느냐고 물었다. 승씨는 “매년 500만원씩 하고 ‘이모 맺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일대일로 미혼모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처음엔 정치 얘기는 묻지도 말고, 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브런치가 좋은 점을 세대 간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라고 대답한 뒤 앞에 앉아 있던 기영씨에게 대뜸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너희들 세대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한나라당의 참패로 귀결된 지방선거에 대한 아들 세대의 입장이 궁금한 듯했다.
(기영씨)“사실 지방선거에 관심이 없었어요. 친구들도 비슷했고요. 내가 안 찍어도 한나라당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젊은이들이 투표장에 많이 간 것이 패인인 듯해요.”

(김 전 장관)“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내가 볼 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것을 밀어붙이고 국민과의 소통이 부족한 대통령의 국정 운영기조에 반감이 있어서고 다른 하나는 우파·보수 진영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교만에 빠져 있어서야. 민심의 흐름을 봤으니 대통령도 고쳐야 하고 기성세대도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해.”
이때 나 여사가 “정치 얘긴 그만하세요. 음식 식어요”라고 만류했다.
다양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브런치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김 전 장관이 브런치를 안 건 30여 년 전이다. 1980년 초부터 2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UC버클리대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얻은 생활습관이다. 미국행을 택한 건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권유였다.

“78년 12월 재무부장관에서 물러나자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의 펠로십으로 미국에 갈 것을 권유했어. 그의 주선으로 80년 1월 버클리대에 ‘아시아연구센터’를 만들고 사무실을 지원받아 미국 생활을 시작했고. 미국행 준비를 위해 미국에 머물던 79년 10·26 사태가 터지면서 급거 귀국해 박정희 대통령 국장을 치렀지.”
브런치를 좋아하게 된 건 형식의 자유로움이 좋아서였단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게을러서 보통 11시쯤 나가 한가로이 아침 겸 점심을 먹었던 게 시작이었어. 당시 에머리빌의 아파트에 월세로 살았는데 한국에서 온 유학생 하용출·장달중 등과 어울려 브런치를 자주 했지. 두 사람은 나중에 서울대 교수를 했고. 우리는 한 시간 반이면 (식사를) 끝내는데 미국 사람들은 11시30분부터 시작해 4, 5시까지 거기서 지지고 볶고 하더라고. 그게 즐거운 모양이더라고.” 당시 김 전 장관은 브런치를 위해 인근 중국 식당, 이탈리아 음식점, 뷔페를 섭렵했다고 한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 전 장관 부부는 주로 자택에서 브런치를 했다. 하지만 두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하고 두 가족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자주 모일 기회가 없었다. 부부가 미국에 들를 때면 기영씨 가족이 유학하던 스탠퍼드대 인근 ‘트레이더 빅스(trader vics)’라는 식당에서 온 가족이 모여 브런치를 즐기곤 했다.
기영씨 가족이 귀국한 2002년부터 브런치 가족모임이 재개됐다. 김 전 장관은 신라·힐튼·강남인터컨티넨탈 브런치식당을 종종 찾는다. 때로는 냉면집에서 브런치를 하기도 한다.

김 전 장관은 “조부와 부모님 등 1년에 제사를 세 번 모실 때 온 가족이 모이지만 그 외엔 별로 기회가 없다”며 “그걸 보완하는 게 브런치”라고 말했다. 기영씨 부부는 2002년 한국에 들어오기 전 4년간 폴란드에 머물렀다. 기영씨는 “당시 일요일마다 쉐라톤호텔 브런치를 갔었다”며 “라이브재즈밴드(스윙밴드)가 식사 도중에 연주를 했는데 폴란드 사람들이 밥 먹는 중간중간에 무대에 나와서 춤을 추는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매번 혼자 조용히 와서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는 “동창회나 동호회 모임도 브런치 스타일로 하게 되면 밤에 술판 벌이지 않아도 되고 음식과 대화를 한껏 즐길 수 있어서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서 가까운 청담동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긴다. 닭고기나 스테이크, 차와 파스타, 야채 등이 주 메뉴다. 포슬린 페인팅 회원들이나 여고동창, 대학 선후배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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