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논쟁 이렇게 본다 <上> 꼬리표 붙이기 그만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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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선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도 전에 벌써 이념논쟁이 치열하다. 이를 두고 과거의 지역주의 균열을 극복하고 정책선거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고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념논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찬반 양론으로 나눠 연재한다.

이념논쟁은 좋은가 나쁜가. 유권자들이 요즘 가장 혼란을 느끼는 질문일 것 같다. 중앙일보는 의원과 국민의 이념과 정책성향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념과 정책대결의 청신호가 들어왔다며 이를 반겼다(2002년 2월 1~5일자 참조). 반면 민주당 경선의 초점이 양 후보간의 이념대결로 옮겨가면서 당 관계자들은 후보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왜일까.

이념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념의 선한 모습이 드러나면 선거의 본래 목적이 달성되지만, 이념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면 선거 결과는 왜곡되고 당선자는 상처뿐인 영광을 안게 된다.

구성원간 정치적 목표에 대한 합의가 있으면 주로 선한 이념논쟁이 일어난다. 선한 이념논쟁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방법론상의 차이에 초점을 맞춘다. 방법에서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정책만큼이나 상대의 정책과 이념도 존중하게 된다. 선거란 한 마디로 정당과 후보자가 이념과 정책을 담은 선거공약이라는 상품을 제시하고, 상품의 우수성을 선전해 국민으로부터 선택되는 과정이다. 특히 당내 경선은 후보들간 정책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기간이므로 경선 후에는 패배한 후보의 정책이 당의 정책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경선은 후보간의 토론과 공방을 거쳐 정책의 타협과 보완이 이뤄지는 생산적인 논쟁의 장이 되는 것이다.

반면 추한 이념논쟁은 정치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포함하므로 상대는 틀리고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흑백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도덕적 우월성을 놓고 경쟁하는 경우에는 누구의 양보도 이끌어 낼 수 없으므로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 된다. 이는 신념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종교분쟁이나 학자들의 인식론 논쟁과 다를 바 없다. 추한 이념 논쟁에서 논리로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므로 알맹이보다는 겉포장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상징 언어를 사용해 상대의 이념에 덧칠함으로써 상대의 이미지를 더럽히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각국의 이념을 둘러싼 전쟁이나 과거 선거에서 등장했던 색깔론이 추한 이념논쟁의 대표적 사례다.

선진 민주국가의 선거에서도 추한 이념논쟁의 예가 발견된다. 1992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클 듀커키스를 진보주의자로 채색하는 데 성공한다. 부시는 정책의 알맹이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승리를 얻어냈지만, 지금까지도 부정적 선거운동으로 당선됐다는 불명예의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일부에서는 이번 선거를 보혁구도로 몰고 가면 보수주의자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환경적 변화를 고려할 때 이념논쟁이 보혁대결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보혁구도라는 용어 자체에는 진보주의자를 혁신주의자로 채색함으로써 소수로 몰아붙이려는 색깔론의 음모가 숨어 있다. 과거 선거에서 색깔론이 그런 대로 먹혔던 이유는 한국전을 경험한 세대들의 공포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가 교육 수준이 높은 전후 세대이며,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는 화해무드가 조성됐다.

색깔론을 들먹인다고 해서 이에 휩쓸릴 유권자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한다. 가령 자유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수로, 구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진보로 분류된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은 보수, 변화를 추구하면 진보라는 분류법이다. 우리나라처럼 국가 중심의 개발독재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 기준을 사용한다면 재벌을 옹호하는 사람만큼이나 귀족화된 강성노조를 옹호하는 사람도 보수주의자가 된다.

결국 진보니 보수니 하는 용어는 무의미하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꼬리표 붙이기는 그만두자. 구체적 정책 사안에 대해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이어질 때 선한 이념논쟁이 이번 선거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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