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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적 기득권층으로 변한 혁명의 주체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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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 08면

1 마담 무아테시에(1856),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780~1867) 작, 캔버스에 유채, 120ⅹ92㎝, 내셔널 갤러리, 런던

여기, 프랑스 화가 앵그르(1780~1867)가 19세기 중반에 그린 한 여인의 초상이 있다(사진1). 그녀가 입은 허리가 잘록하고 어깨가 파인 로맨틱 스타일 드레스는 색색의 꽃무늬로 화사하기 짝이 없고, 가슴과 손목에는 다이아몬드·자수정·석류석·오팔 등 다양한 보석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큰 눈에 상아처럼 매끈한 피부로 다소 개성 없이 고전주의적 정형으로 묘사된 반면, 드레스와 술의 촉감, 보석의 광택은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8> 화려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부르주아지

이 여인이 걸친 것들뿐만 아니라 그녀가 앉은 공단 소파며 뒤에 놓인 중국산 도자기를 보면 부유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신분일까? 공작 부인? 아니면 남작 부인? 아니, 그녀의 이름은 귀족 칭호가 없는 ‘마담 무아테시에’다. 그녀는 공무원의 딸이었으며, 은행가이자 레이스 거래업자인 무아테시에의 부인이었다.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Bourgeois) 계급-부르주아지(Bourgeoisie)-인 것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봉건적 신분 체제인 앙시앙 레짐이 무너진 후 혁명을 주도한 시민계급, 즉 부르주아지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게 됐다. 귀족 계급은 쉽게 물러서지 않고 혁명 후에도 나폴레옹의 군사독재와 왕정 복고 와중에 세력 회복을 시도했지만, 대세는 산업화의 진행으로 더욱 경제력을 얻은 부르주아지에게 기울고 있었다. 이 변화는 앵그르 같은 당대의 잘나가는 화가들이 이 계급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 마담 르블랑(1823)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작, 캔버스에 유채, 119ⅹ9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3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페르디낭 들라크루아(1798∼1863) 작, 캔버스에 유채, 260×325㎝, 루브르 박물관, 파리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부유한 상인 등 성공한 평민 계급이 유명한 화가에게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주문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 작위를 받거나 사들이기 전에는 결코 귀족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나 산업혁명 와중의 영국 등에서는 ‘사장님, 사모님’이 백작 부인 못지않게 화려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나타나는 것이다.

앵그르가 마담 무아테시에보다 30여 년 전에 그린 마담 르블랑(사진2)도 역시 은행가의 부인이었다. 마담 르블랑은 로맨틱 스타일 드레스보다 한 세대 전에 유행한, 허리가 높은 엠파이어 스타일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의상은 마담 무아테시에의 의상보다 한결 검소하지만 터키석으로 장식된 금시계로 은근히 부를 드러내고 있다. 『제인 에어』 같은 당시 소설들을 보면 펜던트 금시계는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고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19세기 초에 유행한 엠파이어 드레스는 고대 그리스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대혁명을 성취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을 고대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리스 시민들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의상은 물론 회화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 강해져 단정한 윤곽에 비례와 균형을 중시하고 이상적인 미를 추구한 그림들이 화단을 지배했다. 이런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미술의 대표자가 바로 앵그르였다.

이런 미술과 패션의 경향은 대혁명으로 쫓겨난 귀족들의 나른하고 향락적인 로코코 문화와 대조를 이루면서 시민계급이 지향하는 산뜻하고 비교적 검소한 새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치마폭이 좁은 엠파이어 드레스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로코코 시대만큼 의상에 사치를 부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엠파이어 드레스 대신 다시 치마폭이 넓어진 로맨틱 스타일 드레스가 유행하게 된다. 이것은 시민계급이 부를 축적한 기득권이 되어가는 시점과 묘하게 맞물린다. 마담 르블랑보다 훨씬 사치스러운 마담 무아테시에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셈이다.

지금 이 글에서 시민계급과 부르주아지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는데, 그 둘은 같은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시민계급’이라고 할 때는 진보적인 혁명의 주체를 떠올리는 반면 ‘부르주아지’라고 하면 반혁명인 기득권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지닌 두 얼굴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선 정치혁명을, 영국에선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낡은 계급제도의 구속에 항거해 만인의 자유와 기본 인권의 가치, 민주주의를 최초로 폭넓게 전파했다. 그들이 지지한 자유경쟁시장체제 역시 전제군주와 결탁한 지주나 특혜 상공인들의 폭리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전반까지 부르주아지가 변혁의 주체로 활동하고 있었음은 앵그르의 라이벌이었던 들라크루아(1798∼1863)의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사진3)에도 나타난다. 이 그림은 종종 1789년 대혁명을 묘사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곤 하지만, 사실 1830년 7월 혁명을 묘사한 것이다. 샤를 10세가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의회 해산, 출판 자유 정지, 선거권 제한 등등의 반동정책을 펴자, 이에 맞서 봉기한 시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가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그들은 결국 3일간의 시가전 끝에 샤를 10세 일파를 몰아내고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맞이했다.

들라크루아는 신고전주의에 맞선 낭만주의(Romanticism) 미술의 리더였다. 이 그림만 보아도 단정하고 감정이 절제된 앵그르의 그림과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적 격정이 그림 전체에 휘몰아친다. 자유를 의인화한 여인이 해방과 혁명당원을 상징하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화승총, 다른 한 손에는 자유·평등·박애의 삼색기를 든 채 시민군을 이끌고 있다. 그들의 발 밑으로는 시가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이 가득하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과 피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알레고리다.

자유를 따르는 시민들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는 높은 실크햇을 쓴 부르주아 청년도 눈에 띈다(이 청년이 들라크루아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주체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산업화와 자유경쟁에 바탕한 자본주의가 낳은 빈부격차 등의 부작용을 지나치게 방관하고 있었다. 또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노동자층으로 확산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고, 일부 산업자본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이를 방해하기도 했다. 영국의 경우 부르주아지는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참정권을 보장받았지만, 노동자의 선거권은 인정되지 않아서 거친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그리고 몇 십 년이 흘러서야 노동자도 선거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층의 갈등은 이미 깊어지고 있었고 이것을 날카롭게 포착한 이들이 사실주의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영자신문 중앙데일리 문화팀장. 경제학 석사로 일상 속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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