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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성 그대로 '감동의 여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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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스승이나 제자, 아니면 동료 교수가 출연하는 음악회에 인사치레로 참석한다면 모를까 여간해서는 공연장 나들이를 하지 않는 음악인들이 대거 눈에 띄었다. '미국서 제일 잘 나가는' 현역 프리마 돈나의 독창회에서 뭔가 한수 배우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지난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의 서울 데뷔공연이 올해 최고의 음악회가 될 것이라고 점친다면 성급한 예감일까.이날 공연의 유료관객은 1천1백71명. 지난해 처음 내한해 장안의 음악팬들을 매료했던 소프라노 제시 노먼(유료관객 2천3백명)에 비해 관객수는 적었지만 감동의 깊이와 여운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듭되는 커튼콜과 기립박수 끝에 준비해온 앙코르곡은 모두 바닥이 나버렸다. 푸치니의'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거슈윈의'서머타임', 김동진의'신아리랑',칠레아의'아드리아나 르쿠브뢰'중'나는 당신의 겸손한 종'.

공연은 2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팬사인회도 80분이나 걸렸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전반부에 들려준 R 슈트라우스의 가곡 네 편이었다. 낮은 음역에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쉬어라 내 영혼아'에서 심금을 울렸다. 오페라 아리아에서는 드보르자크의 '루살카'중 '달에 부치는 노래'가 압권이었다. 국내 성악가들도 즐겨 부르는 이 곡에서 플레밍은 청중이 체코어 가사의 뜻을 몰라도 그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한 뉘앙스를 살려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미성(美聲)은 아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몸서리치면서 전율감을 느끼게 하는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편안하게 내는 발성과 음악적 기본기로 다져진 표현력은, 장 프랑코 페레가 디자인한 그녀의 실크 벨벳 드레스처럼 포근하게 다가왔다.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그녀의 목소리를 가리켜 '더블 크림'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크림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지만 지나치게 느끼하거나 단맛은 아니었다.

레이먼드 허벨의 재즈곡'불쌍한 나비부인'에 이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중 아리아 '어떤 갠 날'을 들려준 것은 절묘한 선곡이었다. '불쌍한 나비부인'에서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벨칸토를 그대로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즈 싱어로서의 잠재적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날 공연에서 건반을 어루만지는 듯한 유연하고 부드러운 타법과 음색으로 목소리와 긴밀한 호흡을 과시한 피아니스트 하르트무트 횔의 맹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살롱음악으로 탄생된 드뷔시의 '빌리티스의 노래'에선 피아니시모의 옅은 색채가 객석 구석구석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1천석 내외의 공연장에서 들었더라면 두 배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이날 공연에 참석한 유료관객의 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가곡 위주의 선곡으로 독창회를 하기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어울리지 않는 무대다. 객석수가 많은 데다 부채꼴이어서 객석에 도달하는 소리 에너지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또 '보리밭''그리운 금강산'등 대중 취향의 선곡은 아니었지만 '신아리랑'대신에 그녀의 장기인 재즈곡을 앙코르곡으로 들려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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