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 "나는 형님을 따르지 않겠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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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보고와 정년이 입당(入唐)하였던 것은 원화 5년, 그러니까 서력으로 810년이었다. 그 때 장보고의 나이는 22세였고, 정년은 그보다 어린 20세도 되지 않은 청소년이었다.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러 장보고는 어느덧 32세의 장년이 되었으며, 정년 또한 30세의 나이에 육박하여 새로운 입신에 도전해야 할 적령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로소 천리안을 얻었다'는 장보고의 고백은 실로 의미심장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북위 말 장제(莊帝)때 양일이란 관리는 29세의 나이로 광주(光州)의 장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백성을 위해 침식도 잊은 채 정무를 보아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또한 법을 엄격히 지켰으나 인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고을사람 모두가 다 잘 따르고, 태평하였다.

한번은 기근이 극심했던 적이 있었다. 길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즐비하였고, 아사자들이 속출하자 양일은 관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였다. 이에 부하가 상부의 뜻을 걱정하자 양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의 근본은 사람이며, 그 사람의 목숨을 잇는 것은 식량이다. 그러니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면 되겠는가. 염려말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풀거라. 만약 이 일이 죄가 된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이 덕에 아사를 면한 백성들의 숫자는 수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장제는 꾸짖기는커녕 "과연 양일이다"라고 감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양일은 백성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관리로서 거만하거나 부정을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하를 각처에 파견하고, 정보망을 그물처럼 쳐놓아 관리나 군인들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관리나 군인들은 뇌물은 감히 생각조차 못하였고, 출장을 갈 때에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갔을 정도이며, 은밀한 곳에서 대접하려해도 아무도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토록 정직하고 성실한 관리들의 태도를 보고 한 백성이 어떤 관리에게 그 이유를 묻자 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상관 양일은 천리안을 갖고 있어서 천리 밖의 일도 훤히 꿰뚫어보니, 어찌 그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칭송 받던 양일도 32세의 아까운 나이에 군벌의 화에 휩쓸려 억울하게 죽게 되는데, 장보고는 12년 동안의 재당 생활을 통해 바로 양일이 가졌던 천리안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일이 거미줄처럼 쳐놓은 정보망으로 부하관리들을 감시하듯 장보고도 중국 곳곳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을 거미줄과 같은 정보망으로 점조직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신라방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통일하여 상계를 이룰 수만 있다면 이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 나와 함께 떠나자."

간곡한 어조로 장보고가 말하였다.

"이미 장변과 장건영의 부하들은 나와 같이 군문을 떠나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였다."

장보고가 말하였던 장변을 비롯하여 장건영·이순행과 같은 부하들은 무령군에서부터 두 사람을 따르던 효장들이었는데, 그들은 장보고의 뜻을 좇아 이미 군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오직 하나. 그것은 아우인 그대뿐이다."

장보고가 손을 들어 정년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러자 정년은 단숨에 소리쳐 대답하였다.

"나는 싫소. 나는 형님을 따르지 않고 그대로 군문에 남아있을 것이오. 옛말에 이르기를 무인불석사(武人不惜死)라고 하였소. 즉 무인은 죽음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오. 설혹 나는 한겨울의 부채가 된다 하더라도 또다시 언젠가 닥쳐올 겨울을 기다리면서 참고 인내하겠소. 형님은 형님의 길을 가시오.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겠소."

그것이 최후의 결단이었다.

이처럼 장보고와 정년이 헤어져 각자의 길로 따로 걸어간 것은 장경 2년. 서력으로 82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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