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0>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24) 금융개혁법안 통과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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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金수석은 정치를 안해봐서 모른데이.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 눈에는 표밖에 안보인다. 그때 노조가 그래쌌고 하는데 내가 전화한다고 김대중이 듣나. "

1998년 3월 상도동으로 찾아간 필자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 전해인 97년 11월 18일,금융개혁법안 국회 통과가 무산된 직후 내가 사의를 표명하며 드렸던 말씀에 대한 최초의 대답이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사의를 표명했었다.

"금융개혁법안 무산은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각하의 공약이 국회에서 안된 겁니다. 연초에 각하께서 대국민담화를 통해 추진계획을 직접 밝히신 일 아닙니까. 온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지금 경제상황과 직결되는 일이 또 안된 겁니다. 각하께서 추진하던 큰 정책이 안됐으니 수석으로서 더 이상 자리에 있기가 민망합니다. "

내가 전하고자 했던 진짜 뜻은 '각하께서는 금융개혁법을 강경식 부총리의 사업으로 보고계시는지 모르지만,이는 바로 각하의 사업입니다'였다.

나는 덧붙여 말을 이어나갔다.

"듣기 싫으실지 몰라도,저는 지금도 금융개혁법안과 관련해 각하께서 직접 DJ에게 협조요청을 해주셨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직원은 김용태 실장에게 맡겨 놓겠습니다. "

그때까지 나는 적어도 세번 이상 金대통령에게 간곡히 진언했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위해 이제 부총리나 수석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마지막으로 金대통령이 DJ에게 직접 법안 통과를 위한 협조를 부탁해 달라고.

같은 내용을 여러번 진언해 金대통령이 역정을 낼 정도였다.

금융개혁법이 노조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치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노조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당시 姜부총리와 나는 야당인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 권한 대행, 유재건 총재 비서실장, 김원길 정책위의장 등을 모두 만나 설득한 끝에 "여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키면 저지하지는 않겠다"는 선의 언질을 받아놓고 있었다.

나는 정치를 해본 적도 없고 정치적 감각도 별로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을 하다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느만큼 감지할 정도는 된다.

나는 그때 金대통령이 확신을 갖고 DJ에게 금융개혁법안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면 DJ는 당시 정치상황에서 결코 거절할 수 없으리라 보았다.

DJ는 대통령 당선을 위해 현직 대통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또 스스로 준비된 대통령 후보라고 하는 DJ가 자신의 집권 후를 위해서라도 금융개혁법이 꼭 필요함을 모를 리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리에 왔다 가면서 IMF 지원에 대해 우리 정부와 기본 합의를 했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이 다 보고받고, 이제 남은 것은 금융개혁법안 통과 하나뿐이라 다들 국회만 쳐다보고 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金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DJ에게 협조를 부탁해 달라고 진언했고, 지금도 나는 그때 金대통령이 직접 나섰더라면 금융개혁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97년 11월 18일, 이렇게 金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나는 대통령 집무실을 나와 김용태 비서실장 방으로 갔다. 10월 29일 냈다가 반려된 사직원을 그때까지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나는 사직원을 꺼내 金실장에게 다시 주었다.

金실장이 아무 말이 없기에 나는 金실장 자리 옆의 탁자 서랍을 열고 직접 사직원을 넣어두었다.

이제 10월 29일의 사직원은 왜 쓰게 됐는지 이야기할 차례다. 그 전날인 28일, 그날도 姜부총리는 하루 종일 국회에 매달려 있어야 했기에 관계기관 대책회의는 밤 9시 30분부터 인터컨티넨탈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하게 돼 있었다.

호텔에 거의 도착할 때인 밤 10시 께 내 차의 카폰이 울렸다. 대통령 관저 비서관의 전화였다.

"각하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

나는 대통령과의 통화는 무선 전화로 하지 않는다는 보안 규정에 따라 차 안에서 바로 金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고 일단 호텔에 도착한 다음 비즈니스 센터의 유선 전화기로 金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정리=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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