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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60년, 전후 세대의 155마일 기행 ⑫ 동해 북방한계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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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동해 저도어장은 어로한계선 이북에 위치한 최북단 어장이다. 북방한계선(NLL)과도 불과 3㎞밖에 떨어 져 있지 않다. 평화로워야 할 조업 현장은 늘 긴장감이 감돈다. 강원도 고성 대진항의 어민들만이 해경에 사전 신고해야 들어갈 수 있다. 어민들이 조업하는 내내 해경과 해군의 경비함이 어장 안팎을 오가며 납북을 경계한다.

동해 최북단 어항 대진항에는 이른 새벽부터 ‘저도(猪島)어장’ 입어를 기다리는 어선들로 분주하다. 저도어장은 어로한계선 이북에 위치한 특별어장으로 4개월간의 금어기를 끝내고 4월 1일 개장했다. 4, 5월 두 달간 날이 궂어 조업일수가 많지 않았다. 6월 들어 풍랑이 멎고 일기가 좋아졌다. 6월 2일 새벽 5시30분, 드디어 조업 허가가 떨어지고 고성군 어업지도선이 출항한다.

동해 저도어장으로 가는 길 왼쪽에 붉은 등대가 둘 서 있다. GPS가 없던 때 어로한계선 표식이다.

방파제를 벗어난 지도선은 좌측으로 동해 해안을 두고 북상한다. 일출 기운에 물든 새벽 바다는 잔잔하다. 동쪽 먼바다로 조업을 나가는 어선들이 간혹 눈에 띈다. 계기판의 위도 표시가 38도 30분, 31분, 32분으로 가파르게 오른다. 긴장감이 한껏 팽창한다. 출항 20분, 지도선이 속도를 늦춘다. 북위 38도 33분 10초. 앞뒤로 나란히 선 두 개의 붉은 등대가 해안에 나타난다. 이 표지 등대가 일렬로 나란해지는 해상이 어로한계선이다. 어로한계선상에 3t급 소형 어선 14척이 마라톤 주자들처럼 도열해 해경의 ‘조업 점호’를 기다린다.

전방에 육지의 단애가 바다로 떨어진 듯한 작은 돌섬이 보인다. 저도어장의 기점이 되는 섬 저도다. 저도 동북방으로 부표 여섯 개가 직사각형을 이루며 떠 있다. 저도어장은 북쪽으로 300m, 동쪽으로 1300m의 직사각형 형태를 갖춘 2.2㎢ 규모의 작은 어장이다. 어장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북위 38도 37분 01초선이 북방한계선이다.

대진리와 초도리 어민들의 조업을 위해 1972년에 개장한 이 어장은 문어·광어·가자미·전복·해삼·다시마·미역이 풍부한 황금어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새 어획량이 급감하고 있다. 그래도 4월 개장 초기에는 80여 척의 선단과 40명에 이르는 해녀들이 어장에 북적였다. 새벽 6시30분. 해경 경비함정이 승선 인원과 조업신고 번호를 확인하고 긴 사이렌을 울린다. 조업 개시를 알리는 신호다. 어선들이 어장으로 돌진한다. 조업하기 좋은 목을 차지하려는 어선들의 필사적인 질주는 저도어장에서만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해군 고속함정 두 척이 어장 바깥에 붙박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해경 경비함정은 어장을 오르내리며 어선들을 보호한다. 긴장 속에서도 조업은 순조롭다. 2006년 탈북한 어부 박명호(45)씨는 대진항에서 알아주는 머구리(수중 잠수부)다. 북에서 익힌 문어 잡이를 하려고 대진항에 정착했다. 그는 “함경도 이원(利原)과 단천(端川)에서 머구리를 했다. 문어는 수온이 낮을수록 육질이 좋고 향이 나는데 이곳 대진, 거진 문어도 북쪽 것들만큼 맛이 좋다. 그리고 저도어장 바다 밑은 아주 아름답다”고 전했다.

취재진이 고성을 처음 찾은 지난달 28일 파도가 높아 저도어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해경 경비함정에 올라 바라본 북쪽 금강산 봉우리들과 해금강 기암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금강산 낙타봉까지 10㎞, 그 뒤쪽 해금강 끝단 수원단(水源端)이 17㎞. 바다에서는 지형지물이 실제 거리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달밤에는 두 배나 더 가까이 보인다. 함정들이 벌이는 삼엄한 경계를 제외하면 철책 없는 해상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곳 NLL 접경 바다는 한때 북한 경비정에 어민들이 피랍되는 사건이 속출하면서 숱한 비극을 낳았다. 50년대 후반 시작된 어부 납북사건은 해군 56함 침몰사고와 미 해군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남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67년과 68년에 절정에 달했다. 67년 11월 3일 하루 동안 명태잡이 어선 10척과 어부 60명이 납북되기도 했다. 2007년 ‘납북 피해자의 보상 및 지원법’이 시행되자 거진 쪽에서만도 58명에 달하는 납북 어부들이 신고했다. 그중 현재 거진 쪽에 생존해 있는 납북 어부는 여섯 명이다. 김무경(78) 할아버지는 온천으로 유명한 외금강면 온정리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어린 나이에 월남하여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가보지 못했다. 그는 거진항에 정착하여 명태 잡이 선원으로 일하며 새로 가족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68년 북한 경비정에 납북되었다. 장전항 근처인 영진항으로 끌려갔던 그는 석 달 동안 평양을 비롯한 명승지를 관람하고 귀환했다. 당시 북한은 납북 어부들을 체제 선전에 활용하려고 했다.

68년 납북됐던 김무경씨. 실향민인 그는 공교롭게 고향으로 끌려가 정든 땅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낮에는 여관에 감금되고 밤에만 이동했다. 살지 죽을지 모를 운명에 이남에 처자식 두고 온 입장에서 어디 좋은 데를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눈에 들어오겠나. 세뇌를 당하겠는가 말이다. 귀환을 두고 어느 날 낮에 여관방 커튼을 들춰보고 자지러졌다. 바로 내 고향집 앞이었다. 가까운 곳에 아버지 묘소도 있었다. 그러나 집도 사라지고 고향 사람들도 이주하고 없었다. 어린 시절 목욕을 다니던 온정탕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는데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울음을 울었다.”

하지만 귀환하자 공안당국이 모질게 취조했다. 간첩 혐의로 조사받았다. 대성산을 가봤느냐? 동료들은 축구를 했다는데 너는 축구를 안 하고 그때 무엇을 했느냐? 간첩 밀봉교육을 받지 않았느냐? 그 와중에 그는 5급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평생을 못 떨친 악몽과 고통 속에서도 그때 고향을 훔쳐보고 온 것만은 남몰래 위안이 되었다.”

여규대(70) 할아버지는 1968년과 1969년, 1년 만에 두 차례나 납북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산다. 어로한계선 인근에서 호롱을 밝히고 오징어잡이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북쪽이었다. 북쪽 조사원마저도 “복도 많소. 어떻게 두 번씩이나 오느냐”고 머리를 내저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납북된 노인이 용기를 북돋웠다. 두 달 만에 귀환할 때 동료 선원 2명은 함께 오지 못했다.

“납북 중에 선실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 사망한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우리만 살아 돌아와서 유가족들에게 차마 그 얘기를 전하지 못했다.”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36개월을 복역했다. 출감해서는 바다를 떠났다. 그러나 납북 어부의 족쇄는 평생 풀리지 않았다.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꾸렸으나 항상 감시가 붙고, 10리 밖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히 이웃들도 피해가 따를까 봐 그의 가족을 피했다. 이제 납북 피해자에게 보상을 한다지만 그는 반공법 위반자라 그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잊혀가는 기억이 되살아나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살아생전에 반공법 위반자라는 누명만은 벗었으면 좋겠다.”

전성태·소설가



명태·남북관계가 바꾼 동해 어로한계선

예전 NLL 주위는 황금어장
어민 생업 요구 따라 올리고
납북사건 많을 땐 다시 내려

‘해마다 겨울, 동해안 북단에는 명태 떼를 둘러싸고 우리 어선의 필사적인 어획전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비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본지 1966년 1월 28일자 3면의 머리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東海(동해)의 三難(삼난) 시달리는 漁民(어민)들’이라는 제목 아래 남한 어선의 납북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원인·실태 등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속초발 해설 기사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선 납북 기사는 신문에서 낯설지 않았다. 그만큼 자주 발생했다. 동해안에서는 60년대 후반이 최악이었다. 66년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위기감을 느낀 북한이 68년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기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을 잇따라 일으키자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다. 북한은 어선 나포도 일삼았다. 67년에는 선박 47척에 선원 352명, 68년에는 선박 90척에 선원 766명이 각각 북으로 끌려갔다. 총리가 동해안을 찾아 안전 어로대책을 점검한 게 뉴스가 되던 시절이었다. 납북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명태의 황금어장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당시 명태는 강원도 어민들의 최대 수입원이었다. 많이 잡혔고 시세도 좋았다. 그 때문에 어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어로한계선을 넘었다. 한 조사에서는 전체 어선의 67%가 어로한계선을 넘어 조업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어로한계선은 자주 변경됐다. 황금어장을 원한 주민들의 북상 요구, 남북 관계 등이 어로한계선 변경에 얽혀들었다. 올해 ‘설악신문사’에서 발간한 『동해안 납북 어부의 삶과 진실』에 따르면 당초 어로한계선은 NLL(북위 38도37분01초)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38도26분 선상이었다. 1분은 1마일, 바다의 1마일은 육지에서처럼 1609m가 아닌 1852m다. 11분 차이가 나니 어로한계선이 NLL 18㎞ 남쪽이었던 셈이다. 57년 11월 어로한계선은 NLL 턱밑인 38도35분45초까지 북상한다. 주민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57, 58년 대규모로 어선을 납치하자 59년 11월 38도30분으로 후퇴한다. 64년 어로한계선은 38도35분45초였으나 67년 1월 북한의 해안포 사격으로 650t 규모 해군 함정이 침몰하자 38도34분45초로 변경됐다. 현재 어로한계선의 위치는 38도33분10초다. 89년에 정해졌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최영기 기자
취재 협조=국방부, 속초해양경찰서, 고성군청, 고성군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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