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의 축'을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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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한의 7천만 코리안들에게 닥칠수 있는 최악의 재앙은 핵전쟁이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 일어나는 남북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 아니면 미국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는 확증은 아직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핵무기가 문제다.

그러나 지금까지, 심지어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냉전시대에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 자체가 대량 살상무기로 공격받지 않는 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해왔다. 한마디로 핵무기를 가지는 목적은 그것을 사용해 전쟁에 이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유함으로써 공포의 균형으로 전쟁을 미리 예방하는 데 있었다.

지금 그런 핵전략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부시 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생각을 '사용하지 않는 무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바꾸고 거기에 맞춰 미국의 전반적인 군사전략을 수정·강화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시 정부가 지난 1월에 의회에 보낸 핵전략에 관한 검토보고에는 참으로 무서운 조항이 들어 있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핵무기로 예방적 공격을 할 수 있고, 지하 깊숙이 뚫고 들어가는 작고 정확한 핵탄두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예방적 핵공격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는 북한과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한 7개국의 이름을 들었다.

부시 정부의 이런 시대역행적인 핵전략을 한반도에 적용하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상상된다. 북한이 화학무기나 생물무기까지 동원해 남한을 공격하면 미국은 핵무기로 북한을 응징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한다는 확증만 잡혀도 미국은 북한의 지하시설을 소형의 정교한 핵탄두로 공격한다.

미국의 핵공격을 받은 북한 정권은 살아남지 못하고 궤멸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이나 북한에 대한 예방공격에서 살아남은 코리안들의 상당수가 방사능 오염의 고통에 시달리고, 방사능에 오염된 유전자는 몇대에 걸쳐 후손들에게 비극의 유산으로 상속될 것이다. 국토의 오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시 정부의 핵전략에 따르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는 경우에도 핵무기 사용을 고려한다. 한반도와 대만해협 또는 중국에서 사용되는 미국의 핵무기는 한국·일본·중국·시베리아에 두고두고 직접 피해와 방사능 물질의 간접 피해를 확산할 것이다. 그리고 이란이나 이라크가 미국의 핵무기 세례를 받아도 먼 나라의 일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러시아가 팔짱 끼고 있을 리 없다.핵군비 경쟁이 필연적이다.

노태우(盧泰愚)정부 때의 비핵화선언에 따라 아버지 부시는 한국에서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철수했다. 그것을 지금 아들 부시가 뒤집겠다고 한다. 부시 정부가 미국의 핵전략을 근본적으로 후퇴시키려는 것과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것은 김대중(金大中)정부가 미국에 대해 너무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햇볕정책으로 부시한테 발목이 잡히고 주눅이 들어서다.

정부는 미국의 핵전략 전환의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필요하면 분명한 이의를 제기해야 하고, 국회와 재야에서는 강력한 반대의 소리가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꿀먹은 벙어리 같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게이트 논쟁과 여당의 경선과 야당의 집안 싸움에 정신이 팔려 핵전쟁의 그림자가 덮쳐올지도 모르는 사태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부시 정부가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압박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북한과 이라크가 테러 이후 미국에 대한 자세를 신중히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대화의사를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핵의 축으로 악의 축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한반도문제나 중동문제 해결에 역기능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핵전략에 반대를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은 패배주의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무기가 작렬하는 전략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생존권의 행사다.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전략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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