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의 도로는 내 놀이터였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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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제일 먼저 손수건부터 챙겼다. 틀림없이 눈물이 터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산에서 제1한강교를 건너면 오른편 첫 동네가 본동이다. 그곳에서 엄마는 좁고 불균형한 3층 건물을 짓고 미장원을 했다. 아버지는 술을 입에도 안댔다.

그러나 아들들은 그렇질 않았다. 매일 격한 소란이 일었고, 막내였던 나는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초·중·고교, 대학을 다니고, 취직을 할 때까지 그곳에서의 25년은 줄곧 그랬다.

그래서 마침내 그 동네를 떠나고 가족들도 흩어져 혼자 살게 됐을 때 그곳을 다시는 안보리라 했었다. 실제로 같은 서울 안이건만 십 여년이 넘도록 나는 한번도 그곳을 되찾지 않았다. 갈 일이 있어도 안 갔다. 그 동네를, 그 집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 삼년 전쯤 마음을 물리고 물려서 딱 한번 찾았던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동네엘 채 들어서기도 전에 눈물부터 터졌다. 내내 울다만 돌아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손수건부터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화창한 봄햇살 때문이었을까. 혹은 동행이 있어서였을까. 그 시절엔 없던 63빌딩이며 아파트가 보이는 강변의 도로에서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 도로가 처음 났을 때 우리 꼬마들은 하루 종일 거기 모여 놀곤 했다.

그때 막 등장한 고속버스를 중앙이니 한진이니, 누가 빨리 구별해내나 경쟁하면서였다. 그 승자는 항상 나였다. 늦도록 집에 돌아가길 싫어하던, 저런 버스를 타고 멀리 가서 혼자 살았으면, 밤이 되도록 지켜보던 아이는 나뿐이었으니까.

그러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좁고 가파른 집 꼭대기에서 노량진 수원지의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했었다. 물이 운동장만하게 저장된 저수대를 향해 내 슬픔에 비하면 어림없다며 도도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곳은 이제 공원이다. 저수대는 넓은 잔디밭으로 바뀌었다. 탯줄인 양 짧은 골목만이 그 시절 그대로인가. 그 넓은 잔디밭 위를 걷자니 수원지의 물 위를 걷는 듯 그 시절이 발밑에서 자꾸 일렁인다.

그런데 그 일렁임이 더는 아프지않고 연두색 새순같이 보드랍고 기껍게 느껴지는 순간, 잔디밭 저쪽에서 커다란 금관악기가 반짝인다. 한 남자가 색소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나는 그 음악을 날 위한 축하음악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내가 마침내 옛동네, 옛집과 화해를 시작했음을, 실은 내 시의 수원지였을 그 '고향'과 나의 '고향'과 '25년의 시간들'을 용서하기 시작했음을 축하해주는 음악이라고….

김경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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