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왕 거미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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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대기만성(大器晩成). 세계 최고의 수문장을 다투는 올리버 칸(33·독일)과 파비앙 바르테즈(31·프랑스). 그들은 기나긴 고통의 숲을 헤치고 지금 또다른 비약을 위해 2002년 6월을 기다리고 있다.

▶칸-세월과 실력은 비례한다.

안정된 볼처리에 수비진을 이끄는 리더십까지. 그의 실력은 최근의 잇따른 수상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지난해 '독일 올해의 선수'에 오른데 이어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선정한 '최우수 골키퍼' 부문에서도 2백65점을 획득, 칠라베르트(파라과이)가 갖고 있던 최다득표(1백98점) 기록을 훨씬 웃돌며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나 그에게 20대는 2인자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았던 시기였다.1994,98 월드컵 때 보도 일그너와 안드레아스 쾨프케에게 자리를 내주고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무기력했다. 98년 월드컵 때는 29세였고 남들은 전성기라고 하는데 나는 언제나 한번 뛰어볼 수 있을까 막막했다. 그렇게 선수생활을 접는 줄 알았다"고 칸은 당시를 언급했다.

그러나 인고가 그에겐 내공을 안겨다 주었을까. 99년을 맞이하면서 그는 기존의 파워 넘치는 플레이에 노련미와 관록을 덧칠하며 독일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했다.

▶바르테즈-마지막 반전을 노린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지단이란 걸출한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함과 동시에 바르테즈를 전설적인 골키퍼 야신의 후예로 올려놓게 만든 무대였다. 7경기에서 단 2골만을 내준 그물손 방어력. 골키퍼로선 다소 작은 키(1m83㎝)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그의 판단력이었다. 그는 '골키퍼란 손과 발이 아닌 머리로 하는 포지션'이란 신개념을 도출시킨 주인공이다.

바르테즈는 열아홉살이던 90년 대표팀에 전격 발탁됐으나 출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94년 호주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주전 골키퍼 버나드 라마의 부상으로 행운을 잡은 그는 90분 동안 철벽 방어로 에메 자케 감독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96년 초 마리화나 복용혐의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는 등 방황하기도 했으나 월드컵과 유로2000에서 프랑스를 우승시키며 천문학적인 몸값의 선수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또다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난해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상대 공격수에게 볼을 빼앗겨 실점한 데 이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과의 경기에선 상대 공격수 티에리 앙리에게 패스, '자책골에 능한 골키퍼'라는 오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선 "월드컵에서 실추된 명예를 되찾겠다"는 각오가 사뭇 비장할 수밖에 없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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