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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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 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김현승(1913~75) '무기의 의미'

고독이 뼈저리게 견고해지면 칼이 된다. 칼집 속에서 혼자 우는 칼은 오히려 제 모습을 비추는 내면의 거울. 그래서 칼은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이 윤리적인 시의 정장(正裝)의 문법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밤이슬에 녹슨 칼을 백주 대낮에 휘둘러 우리들 가슴에 상처만 내놓는 선무당들에게 이 칼을 보여주고 싶지만, 어찌하랴. 칼은 못 보고 칼집만 보겠지.

김화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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