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 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김현승(1913~75) '무기의 의미'
고독이 뼈저리게 견고해지면 칼이 된다. 칼집 속에서 혼자 우는 칼은 오히려 제 모습을 비추는 내면의 거울. 그래서 칼은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이 윤리적인 시의 정장(正裝)의 문법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밤이슬에 녹슨 칼을 백주 대낮에 휘둘러 우리들 가슴에 상처만 내놓는 선무당들에게 이 칼을 보여주고 싶지만, 어찌하랴. 칼은 못 보고 칼집만 보겠지.
김화영<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