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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장군’ 홍범도, 봉오동전투 승리로 이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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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항일무장 투쟁사에 지워지지 않을 신화를 남긴 홍범도(洪範圖·1868~1943). 그는 그때 사랑하는 가족을 민족을 위한 제단에 희생했다. 사진은 연해주 협동농장에서 일하던 1929년 재혼한 부인 이인복과 손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홍대장 가는 길에는 해와 달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행야 에헹야 에헹야 에행 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 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 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국망(國亡) 이후 함경도 사람들은 1907년 11월부터 만주로 저항의 거점을 옮길 때까지 일 년여 동안 홍범도의 의병부대가 거둔 연전연승의 기억을 되새기는 노래를 부르며 나라를 다시 찾을 날이 어서 오길 기다렸다.

“독립이 국제연맹에 요구해 얻을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최후 철혈주의로 해결되리라고 보는가?”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동휘는 미국에서 외교독립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무장 독립투쟁의 개시를 통보했다. 이듬해 1월부터 6월까지 홍범도 부대 등 독립군들은 28차례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유격전을 전개하자 일본군 수뇌부는 국경을 넘는 간도 출병을 국경 수비대에 명했다. 6월 4일 삼툰자(三屯子)에서 두만강 건너 은성과 종성 쪽을 타격하려던 독립군 부대를 쫓아 일본군은 강을 건넜다. 6월 7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일본군 추격대가 왕청현(旺淸縣) 봉오동(鳳梧洞)에 모습을 드러내자 고지에 매복해 있던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의 총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7일 월경한 일본군 120~130명과 독립군 200여 명이 맞싸워 독립군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병사 49명과 장교 3명이 죽었다.”(‘왕청현 정보한란(呈報韓亂) 등 20호’) 봉오동전투를 숨어서 지켜본 중국군 장교의 보고가 잘 말해주듯 일본군이 ‘날아다니는 장군(飛將軍)’이라 칭할 정도로 기민한 유격전술을 편 홍범도는 그때 또 한번 불멸의 기억을 남겼다.

그러나 그해 그가 김좌진과 함께 거둔 청산리대첩 이후 거세진 일제의 공세를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는 레닌의 적군(Red Army)에 이용당하다 사살되는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참극(慘劇)을 썼다. 그는 1921년 6월 27일에 일어난 ‘자유(스보보드니)시 참변’에서 살아남았지만, 1943년 향년 75세를 일기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한 전선에 다시 설 수 없었다. 힘의 정치가 관철되는 제국의 시대에 우리의 독립을 도와준 선한 외세는 없었다는 것이 한 세기 전 슬픈 역사가 말하는 경험칙(經驗則)이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 일본이 일어나고, 중국은 되나오니, 조선사람 조심하라!” 해방 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던 경구가 다시 귓전을 때리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