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이 본 책과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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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타계 30년이 가까운 홍이섭(1914~74)은 여러모로 되새겨 볼 만한 역사학자다. 본디 과학사 연구로 출발해 해방 전 일본어로 발간된 그의 고전적 저술이 『조선 과학사』였다. 그것이 다시 우리말로 선보인 게 46년 정음사 본(本). 이것만 끼고 있어도 선구자 소리를 들었을 홍이섭은 50년대부터 다산 정약용 연구를 포함한 사상사와 독립운동사로 관심영역을 넓혀갔다 했더니만 만년의 그는 전혀 새로운 시도와 함께 그 자체로 화제를 낳았다. 채만식의 대표작인 소설 『탁류』분석을 통해 일제시대의 사회경제사를 복원하는 시도 말이다.
만년의 그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던 그 유명한 글은 사람들을 거의 감전시켰다. 생각해보라. 본디 허구의 세계인 문학 텍스트를 들여다보며 사회경제사적 현실과 정신사를 재구성해내겠다는 '물구나무 선' 연구방식 말이다. 미시사(微視史)내지 생활사에 대한 박래(舶來)풍문이 들려오기 20년 전 얘기다. 물론 문장은 고질병이었다. 너무 비비 꼬여 지금 읽어도 영 모래 씹는 맛이다. 우리말로 사유하고 글쓰기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앞 세대 거의 전부의 불행이니 그건 일단 넘어가자.
어쨌거나 지난주 '행복한 책읽기'에 내보냈던 김상봉 교수의 철학서 『나르시스의 꿈』(한길사)을 접하며 기자는 기분 좋은 충격을 맛보았다. 육화(肉化)된 사유를 제대로 된 우리말로 구사하는 건 기본이다. 신선한 건 철학서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시인(만해 한용운)과 재야 쪽 사상가(함석헌)가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얘기 정도가 아니다. 근대 이후 중증(重症)의 자기망각을 벗어나기 위한 철학연습의 핵심 텍스트로 그들이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그게 '혼자 하는 헛소리'가 아니려면 두개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데,그 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우리 삶 거의 전부를 규정하는 서구라고 하는 문턱,그리고 모더니티라는 문턱 두개를 넘어서는 일정한 성취 말이다.
음미해볼 대목은 김상봉의 목소리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미 이 시대의 어떤 코드다. 지난해 철학자 이정우는 철학 에세이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산해)를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해방 전후 지금까지 대학 아카데미즘이 허위의식에 빠져 동학(東學) 등 민족종교 같은 재야철학을 철저히 배제해왔고,"역사와 단절된 공허한 철학"으로 변질돼왔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현재 우리의 삶은 더욱 누추하고 족보도 없다. 그 결과 재야철학은 유사(似)소종교로 바뀐 채 주변부를 헤맨다. 강단 철학은 어떤가.
'지식인의 무덤'을 말했던 이가 프랑스의 리오타르였지만, 이제 그 강단 학문은 지식 대중에게 버림받는 무덤의 수준이다. 지난해 '먹물'지식인을 한껏 조롱한 TV드라마 '아줌마'가 그것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 지성사는 여당(강단 학문)과 야당(재야)사이의 정권교체가 꽉 막혀 있다. 사실 미셀 푸코·자크 데리다 등도 프랑스의 '빈들의 목소리', 즉 재야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활동을 지켜보다 좋다 싶으면 강단 학문이 냉큼 받아들여 새 피로 활용하는 노하우를 그들은 가진 것이다. 그걸 배워야 할 때가 지금이다. 김상봉 말대로 자기망각을 벗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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