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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8> 제99화 격동의 시절 검사27년 <4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부산고검장으로 재직하던 1992년 12월 15일 당시 국민당 김동길(金東吉)선거대책위원장이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을 폭로했다.
부산시장과 부산경찰청장,안기부 부산지부장, 보안부대장, 부산지검장, 상공회의소회장 등 부산지역 기관장 7명이 11일 아침 7시 부산시 남구 대연동 초원복국집에서 김영삼(金泳三)민자당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대책회의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국민당은 이들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제시했다. 국민당은 마치 부산지역 공안기관 책임자들이 金후보 당선을 위해 엄청난 부정선거를 모의한 것처럼 정치적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민감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김기춘(金淇春)법무부장관은 경남고 선배인 金후보의 유세에 참관하고 개인적 볼 일도 보기 위해 부산에 왔다. 그러다 부산지역 기관장들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金후보 당선 지원 등 선거 이야기를 한 것이 '대책회의'로 규정된 것이다.
나중에 검찰은 金 전 장관을 불구속 기소했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공소를 취소했고 다른 기관장들은 처음부터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나는 그 초원복집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그 전날 서울에서 金 전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산에 내려가니 차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에 김해공항에 영접을 나가 차를 빌려 줬다.
그리고 저녁에 나와 정경식(鄭京植)부산지검장 등 몇 명은 金전장관과 함께 술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 자리가 끝날 무렵 鄭검사장이 "내일 아침 金장관과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참석하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金장관과 저녁 늦게까지 같이 있었으므로 조찬에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
나도 지검장을 해 보았지만 기관장들의 모임에는 그리 큰 모임이 아니면 가능한 한 고검장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평소 생각했다.
더구나 공식적인 부산지역 기관장들 모임에 고검장은 정규 구성원이 아니었다. 지검장이 참석하는 자리에 고검장까지 참석하는 것이 모양으로나 직급을 중시하는 공무원 사회 정서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金 전 장관과의 아침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지자 경향 각지의 아는 사람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어떻게 그 자리에 빠졌느냐, 다행스럽다는 등….
처음에는 참석한 기관장들이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선거전이 한창 달아오르고 부산의 지역감정에 불이 붙자 그 사건이 오히려 金후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부산 지역에서는 참석자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로서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측면이 있기도 하였으나 왠지 찜찜한 느낌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부산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다른 지역 모임에는 고검장도 참석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기관장들이 고통받는데 나는 시달리지 않아 미안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말썽이 날 것을 알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약삭빠른 기관장이거나 金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김영삼대통령 취임후 내 이름이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때, 문민정부 핵심 인사들이 내가 초원복국집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1993년 3월 고등고시 후배인 박종철(朴鍾喆)대검차장이 총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사직서를 법무부로 보냈다. 사표가 곧바로 수리되지 않아 약 1주일을 기다린 뒤 퇴임식을 갖고 27년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났다.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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