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만은 호남과 서울을 잇는 중간 기착지로 우리 역사상 주요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낸 현장이다. 사진 아래쪽에 아산만방조제를 통해 평택으로 연결되는 38번 국도가 보인다. [아산시 제공]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는 3월부터 교양과목 ‘아산문화의 이해와 탐방’을 개설해 현재 수강생 109명으로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조한필 기자
장학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백제부흥전쟁과 아산만’(1일 발표)
최근의 학술 논문들은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백강’의 위치를 금강하구로 비정하고 있다. 주류성은 변산반도의 위금암산성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임존성(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동산리)과 주류성(부안 변산반도) 거리가 멀어, 백제 부흥군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기 어렵다. 또 군사력이 부족한 부흥군은 평야지대(금강 남쪽) 보다 협곡지대(금강 북쪽)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을 것이다.
박성흥·박태신 부자(父子) 향토사학자(예산)의 주장이 주목된다. 이들은 주류성을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 학성산성으로 본다. 그러면 임존성과의 거리는 12Km. 학성산성 주변엔 많은 산성, 중첩된 산곡이 있어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쉽다. 또 백강을 아산만으로 추정한다. 신라 육군이 백제 남쪽의 거물성 거열성을 점령할 때 신라 수군은 기습적으로 백제 북쪽의 사평성(당진 신평면)을 함락했다. 이것은 당군을 안전하게 아산만에 상륙시키기 위한 사전조치다. 그런 후 신라는 당 선단을 당진군 석문면 장고항 쪽으로 인도했다. 이때 당군은 리아스식만인 아산만 모습이 강과 비슷하고, 해안 차돌이 하얗게 보여 백촌강(白村江)이라고 불렀을 거라는 것. 아산만은 무한천과 연결돼 임존성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
‘대몽항쟁과 아산만’(1일 발표)
1256년(고종 43) 4월 선장도에 피신한 천안민들이 몽고군을 공격했다. 이 지역 피난을 지휘한 충주도순찰사 한취는 선박을 동원, 몽고병을 역습, 섬멸시켰다. 6월에는 강화도정부가 파견한 이천 장군의 수군이 온양에 이르러 몽병을 격퇴했다. 다음 달엔 무인집정자 최항(최우의 아들)의 야별초군이 아산만 일대에 투입됐다.
몽고군과 대치했던 성안말성이 있던 읍내동 옛 온양읍내. [윤용혁 교수 제공]
아산은 조정이 피난 간 강화도의 안전판이었다. 아산만이 적에게 장악되면 강화도는 울타리를 잃는 셈이었다. 이 일대의 풍부한 생산력, 강화도 연결 조운로 확보 차원에서 아산만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읍내리 산성, 성안말산성, 배방산성 등은 전란기 이용 되었을 성들이다. 아산은 다른 인근 지역민들의 피란처이기도 했다. 평택주민들이 아주(아산)의 영인산성, 천안주민은 삽교천 하구 선장도로 피난했다.
김일환 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임진왜란과 아산만’(8일 발표)
임란 중 타계한 이순신의 노모 시신과, 노량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이 이동한 경로이기도 하다. 전란 이후에는 왜병이 짓밟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자연환경 조건, 해양 교통의 편리성, 농토의 풍요함이 서울 사대부들의 새로운 낙향지로 인식되어 아산을 비롯한 내포지역에 전장(田莊)을 두지 않은 사대부가 없었다. 실례로 박지계는 임란 때 피난 왔다가 다시 아산에 왔다, 이들은 이 지역 문풍을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산만 백석포로 상륙한 청군과 일본군 전투 장면. [윤용혁 교수 제공]
정유재란때 왜군은 부여·한산으로 올라와 공주를 거쳐 천안으로 진출했다. 이들 직산(稷山)의 소사평 전투에서 명군에게 패해 다시 후퇴했다. 이때 아산을 침범한 왜적들이 온양온궁과 이순신 본가를 분탕질해 잿더미로 만들고 막내아들 이면을 살해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청일전쟁과 아산만’(8일 발표)
전함 요시노(4150t), 나니와(3650t),아키츠시마(3150t)로 구성된 일본함대가 아산만으로 향하는 청나라 북양함대의 광을함(600t), 제원함(2355t)을 풍도 부근에 맞았다. 일 함포 사격에 광을함은 망가져 좁은 수로로 도망쳤고, 제원함은 선원 20명이 전사한채 함대기지가 있던 산둥 웨이하이로 가까스로 피했다. 나니와함은 제원함을 쫓다가 고승함과 조우하게 된다. 나니와함 함장은 10년 후 러일전쟁(1904) 영웅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염치읍 강청리에 있는 진청암이라 새긴 돌. [윤용혁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