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보안법 날치기 상정이 개혁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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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열린우리당이 어제 국회 법사위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변칙 상정했다. 사회권을 가진 한나라당 소속 법사위원장을 제치고 여당 의원들이 위원장석을 점거해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당 측 법사위 간사를 맡은 의원은 사회봉 대신 책자로 탁자를 두드려 의안을 상정하는 해프닝을 벌였고, 이를 저지하는 야당 의원들과의 사이에 욕설과 고함, 몸싸움이 난무했다. 이쯤 되면 '날치기 상정'이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도대체 여당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무리수를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당이 보안법 폐지에 목을 매고 한나라당은 이에 결사 반대하는 와중에 국회가 아예 작동을 멈추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각 상임위에 계류 중인 법안이 867건에 법사위에만도 63건이 계류 중이다. 상임위에서 통과된 법안은 모두 법사위를 거쳐야 하는데, 법사위가 이런 무법천지로 변했으니 다른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않을 게 뻔하다. 보안법만 통과시킬 수 있다면 나머지 민생법안과 경제회생 법안은 처리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배짱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더구나 상임위의 상원이라고 일컫는 법사위에서 물리력과 편법이 동원된 데 대해 정치권 전체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여당은 "위원장이 사회를 거부해 다수당인 여당 간사가 이를 대신했다"고 적법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보안법 문제는 대한민국의 체제와 관련된 상징적 사안이 된 지 오래다. 그렇기에 국회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했다고 해서 마음대로 폐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야당과도 타협하고 국민에 대해서도 시간을 갖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국민이 다수인 게 현실 아닌가. 이를 외면한 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안법만은 없애야겠다고 한다면 그 의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숫자에 밀려 대통령 탄핵안을 저지하지 못했을 때 국회에서 대성통곡한 의원들은 열린우리당 소속이었다. 그런데 보안법 폐지처럼 민감한 사안을 숫자의 힘으로 강행 처리하려 한다면 역풍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