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1% 북한 지원에 쓰자] 동·서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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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82년 여름 동.서독 비밀협상을 맡고 있던 샬크 골로드코브스키 동독 대외무역부 차관이 서독 창구였던 프란츠 스트라우스 기사당 당수를 극비리에 찾아갔다. 동독이 서방은행에서 차관을 얻는 데 서독정부가 보증을 서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독 지도부는 서독 정부의 대(對)동독지원이 체제유지에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나, 대외신용도가 떨어진 상황에선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 서독에 손을 내민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즉각 정부와 협의한 뒤 차관보증을 위한 협상개시 조건을 제시했다.

'인적.통신교류를 확대하고 동.서독간 여행규제를 완화하며, 국경에서의 총격 사살행위를 금지하고, 동.서독간의 미체결 분야인 환경.문화.교육회담을 재개하자'는 게 그것이다. 동독이 조건을 수락하자 동.서독 정부간에 차관보증 협상이 시작됐고, 83년 6월 10억마르크(약 6천억원)의 차관이 동독에 제공됐다.

서독은 지원이 이뤄질 때마다 즉각적인 반대급부를 요구한 것은 아니고, 동독의 입장과 사안의 시급성 등을 감안해 '동시'와 '비동시'를 적절히 혼용했다.

서독은 75년 베를린~함부르크 고속도로 건설 등을 위해 17억여마르크를 지원했으나 그 대가인 신용카드의 동독 도입 등은 80년대에 실현됐다. 다만 이산가족 재결합과 정치범 석방 등 인도적 문제의 해결을 할 때는 '동시성'을 택했다.

분단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의 문제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최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게 서독의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독에 억류됐던 정치범 및 동독지역 이산가족의 서독이주를 위해 1인당 4만~9만5천마르크를 동독측에 지불했다. 하지만 동독이 금수품목으로 지정된 전략물자를 구입할 것을 우려해 현금 대신 식료품.공산품 등을 전달했다.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이후 본격화된 동독지원에서 서독정부는 처음부터 동독이 난색을 표명할 수준의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다.

송영대 전 통일부 차관은 "서독은 처음엔 느슨했지만 점차 강력하게 인적교류 활성화와 동독의 민주화 등을 경제지원의 조건으로 내걸었다"면서 "동독은 점차 서독 의존도가 높아지자 어쩔 수 없이 서독이 요구하는 반대급부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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