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은 현대화 갈등의 표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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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역사의 종언』 등의 저서를 통해 냉전 이후 국제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온 프란시스 후쿠야마(미 존스 홉킨스대.국제정치학)교수가 16일 내한, 세계경제연구원 주최의 강연에서 9.11 테러와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후쿠야마 교수는 우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공격에서 예상을 뒤엎고 조기에 승리를 거둔 첫째 요인으로 군사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들었다.

그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와 전쟁을 벌이면 장기전의 수렁에 빠질 것이란 '월남전 콤플렉스'가 공격 초기 팽배했으나 '군사혁명'에 비견될 만큼 발달한 전투기술 덕에 개전 두달 만에 탈레반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원거리 출격.정밀조준 폭격 등을 구사하는 미국의 군사력은 폭탄을 마구잡이로 쏟아붓던 월남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어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의 '문명 충돌론'을 비판하면서 "지금의 세계가 겪고 있는 갈등의 근본원인은 문명충돌이 아니라 현대화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야기하는 대립"이라 규정하고 9.11 테러는 그같은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는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시장경제로 요약되는 서구적 기준의 현대화를 수용했지만 이슬람권만은 현대화에 강하게 저항해왔다"며 "이들 중 특히 비이슬람적 요소를 일절 부정하는 과격세력이 9.11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빈 라덴등은 파시즘 집단

후쿠야마 교수는 그러나 "이들 과격세력은 국민과 분리된 소수 파시즘 집단에 불과하다"면서 "테러에도 불구하고 현대화는 전세계에 계속 확산될 것이며 이슬람권에서도 국민의 자체 개혁을 통해 현대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프가니스탄 이후의 전쟁 방향에 대해 "미국은 극단주의 아래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이라크를 공격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공격이 성공하면 미국은 비로소 중동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미국이 소말리아.북한 등 다른 테러지원 국가들도 주시하고 있으나 "미국의 대북한 공격은 가능하지 않으며 미 정부 내에서 논의조차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햇볕'제동 잘된 일일수도

후쿠야마 교수는 부시 행정부가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내에서도 북한지원에 비판이 많았던 만큼 햇볕정책에 제동이 걸린 것은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권과도 다른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이한 체제"라면서 "이 때문에 북한은 붕괴될 것이라고 10년 전부터 주장해 왔지만 이상하게 여태껏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는 미국은 9.11 이후 정치.군사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더욱 굳혔으며, 어떤 나라도 이에 도전할 능력이 없어 미국이 자신의 가치관을 각국에 강요하는 행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강찬호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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