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공인 기업구조조정 전문가제 도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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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단연 구조조정이었다. 그래서 지난 3년간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위한 제도와 방법 그리고 구조조정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의 폭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옛말이 생각날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구조조정전문회사(CRC)제도 등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다. 구조조정 전문회사가 많이 생겼으며 산업발전법.기업구조조정촉진법 등 많은 관계법령도 새로 만들어지거나 바뀌었다.

제도나 기구.법령 측면에서 한국은 이제 아시아에서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기업 회생이나 퇴출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이른바 '통합도산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으나 이것도 내년 중에 마무리된다니 기대가 크다.

현재의 도산 3법(화의.회사정리.파산법)은 기업 청산에 비중이 실렸으나 통합도산법은 미국의 도산 관련법과 비슷한 것으로 신속한 기업 회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 법원의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해 파산과 회생의 여부를 가리고, 신속한 갱생을 위해 기존 경영진도 중용함으로써 부실기업의 도산신청에서부터 회생에 이르는 절차가 명료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법이 제정되면 제도에 관한 한 우리는 국제적 기준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구조조정도 결국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공인 기업구조조정 전문가'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이 제도는 미국에서 1993년 시작된 이른바 'CTP(Certified Turnaround Professional)'제도와 비슷하다.

미국 CTP들은 5년 이상의 실무경험과 철저한 윤리의식을 지니고 업계 내 3인 이상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후보자들은 어려운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도덕적 자질을 재검증받아야 비로소 CTP로 공인받는다.

이들은 구조조정과 기업회생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기업 구조조정의 실행 과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변호사 못지않은 명성을 쌓으며 구조조정의 마법사로서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도산처리 관련법은 채권자들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가급적 제한하고 있다. 관할 법원은 부도 시점부터 구조조정의 실행 및 기업회생에 이르기까지 CTP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공인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제도가 정착되면 과거에 지적받았던 전문가의 부재나 이들의 도덕적 해이에 관한 문제도 크게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병을 치료하려면 환자의 의지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구조조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 종사자와 이해 관계자들의 노력이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는 데는 환자를 돌보는 전문의의 세심한 처방도 중요하다. 의사만 잘 만나도 웬만한 병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기업 구조조정도 같은 이치로 설명할 수 있다. 구조조정 전문회사(CRC)와 CTP 등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단계별로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면 구조조정 당사자들의 고통을 휠씬 덜 수 있다. 결국 구조조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합리적인 제도와 이를 실행하는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새해에는 통합도산법의 제정과 함께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CTP제도의 도입으로 우리의 현실에 맞는 상시(常時)구조조정체제가 정착될 것을 기대해 본다.

이영탁 <한국crc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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