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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새로이 집사부시중에 발탁된 김명(金明).

그는 죽은 김충공의 외아들로 김양보다 8살이나 어린 19살의 청년이었다.

흥덕대왕과는 달리 가족적으로 매우 번성하였던 김충공은 여러명의 딸이 근친왕족들과 결혼해서 막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김충공의 딸 중의 하나인 정교(貞嬌)는 선왕이었던 헌덕왕의 태자비가 되었고, 다른 딸은 훗날 희강왕(僖康王)이 된 제융(悌隆)과 혼인했으며, 또 다른 딸 조명(照明)은 김균정의 후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의 기록에 의하면 선왕이었던 헌덕왕의 부인인 귀승부인(貴勝夫人)이 충공각간(忠恭角干)의 딸로 되어있으므로, 김충공의 또 다른 딸은 헌덕왕의 왕비였음에 틀림없었다.

이처럼 김충공은 자신의 딸들을 대왕뿐 아니라 가장 왕권에 가까운 근친왕족들과 정략적인 혼인을 시킴으로써 누가 보아도 국가 최고의 권력자였다.

일찍이 선승 홍척(洪陟)이 중국유학에서 귀국했을 때의 상황을 최치원은 지증(智證)대사 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흥덕대왕이 대업을 계승하고 선강태자(宣康太子)가 감무(監撫)를 하게 되매 사도(邪道)를 제거하고 나라를 구제하며 선을 좋아하며 집안을 살찌게 하였다."

이 비문에 보이는 선강태자는 다름 아닌 김충공. 그러므로 김충공이 흥덕대왕의 태자로 정식 책봉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최치원의 비문에 선강태자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모든 왕족들이 김충공을 흥덕대왕의 후계자로 보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김충공이 하루아침에 급사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그의 외아들 김명이 19세의 나이로 권력서열 제2위인 집사부시중에 발탁됐다.

김양은 김명의 소문을 익히 전해 듣고 있었다.

김명은 15세의 나이에 화랑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수련을 하다가 맨주먹으로 나타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용맹하고 힘이 센 장사였다. 실제로 김명이 잡은 호랑이의 가죽이 시중에 전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정도였다.

따라서 경주 백성들은 김명을 가리켜 '힘은 산이라도 빼어 던질만하고,기는 세상을 덮어 버릴 만큼 웅대하다'고 하여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해동항우(海東項羽)'라고 별명을 붙여 부르곤 하였다.

그는 황우처럼 힘이 장사일 뿐 아니라 술과 여자를 함께 좋아하는 호방한 성격의 파락호이기도 했다.

낭도가 되어 전국을 순행하다가 비구니와 관계를 맺어 파계시켰다는 소문 역시 신라의 온 사회에 퍼져있었는데, 당대 제일의 인격자이자 모든 정무를 총괄하는 김충공의 외아들로서 학문을 등한시하고, 오직 무예와 풍류에만 관심이 있는 김명의 추문은 멀리 무주의 변방에 나와있는 김양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파다했다.

아들의 이런 행위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아버지 김충공은 서둘러 김명에게 혼인을 시켰다. 그의 부인은 김충공의 친구였던 김영공(金永恭)의 딸 윤용(允容)이었다. 김영공은 김충공이 시중을 물러나 상대등이 될 무렵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할 만큼 김충공과 막역한 사이였는데, 김명은 이처럼 명문귀족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나 엽색노릇은 여전하였다.

여염집 여인들을 유혹하거나 심지어 천민으로 알려진 광대들과 무척(舞尺)들과도 놀아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팔난봉 김명이 하루아침에 집사부시중에 올랐다.

그러므로 천하장사 김명이 자신의 아버지였던 선강태자, 김충공이 당연히 물려받았어야 할 왕위를 상대등 김균정이 대신 물려받아 흥덕대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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