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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김영갑, 그 떠난 지 5년, 제주엔 여전히 바람 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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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맑았는데. 이놈의 제주 날씨….” 혼자 투덜거리자 옆자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가 심드렁하게 내뱉는다.

“영갑 행님 보러 올 때 언제 날 좋은 적 있었나? 영갑 행님이 다 알아서 할 기라.”

정말 그랬다. week&이 김영갑과 처음 인연을 맺은 2003년에도 비가 내렸다. 2003년 12월 12일 week&은 ‘사람이 희망이다’란 제목의 커버 스토리를 내보냈다. 거기에서 week&은 루게릭 병에 걸린 제주 사진작가 김영갑의 사연을 처음 보도했다. 그때 김영갑은, 병원이 내린 시한부 판정을 2년 더 넘겨 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폐교를 사진 갤러리로 바꾸는 공사를 벌인 참이었다. 두 발로 걷기는커녕 손도 마음대로 올리지 못해 엎드려 죽을 핥아먹던 47㎏의 희귀병 사진쟁이가 삶을 붙들고 있는 모습에 독자 반응이 쏟아졌다. 기사가 나간 뒤 바로 출간된 김영갑 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갤러리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김영갑이란 사내가 있었다. 제주 중산간을 홀로 헤매 다니며 사진을 찍다 온몸의 근육이 마르는 병에 걸려 세상과 이별했다. 사내가 떠나고 나서야 세상은 그가 남긴 사진을, 아픈 육신 이끌고 일군 갤러리를 알아본다. 김영갑이 남긴 사진 중에서.

두어 달쯤 뒤 갤러리를 찾았을 때 김영갑은 “덕분에 갤러리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뒤로 김영갑은 형님이 됐고, 제주에 내려갈 때마다 갤러리를 들렀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던 형님은 그러나 2005년 5월 29일 아침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아 생전의 김영갑. 2003년 겨울의 모습이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갤러리에서 박훈일(41) 관장과 함께 중산간 지역으로 출발했다. 박 관장은 형님을 “삼촌”이라고 부른다. 김영갑이 제주에 막 내려왔을 때 형님은 박 관장 집에서 몇 해를 살았다. 그 인연으로 박 관장은 형님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배웠고, 형님이 훌쩍 가버리자 주인 잃은 갤러리를 떠맡았다. 형님이 떠나고서 5년 사이, 갤러리는 명소가 됐고 박 관장은 폭삭 늙었다.

용눈이오름에 올랐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등산화 안까지 빗물이 차올랐고 모진 바람에 얹힌 비가 옆에서 따귀를 때렸다. 그래도 K선배는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댔다. 이튿날도 호된 비바람과 싸우며 온종일 중산간을 헤맸다. 저녁 뉴스를 보니 그날 제주 산간지역은 호우 경보 상태였다. 한나절 만에 600㎜가 넘는 폭우가 퍼부었다.

5주기만 아니었어도 이토록 미련하게 작업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사상에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못난 동생들의 성의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김영갑이 남긴 20만 장의 제주 풍경 중에서 맑은 하늘은 많지 않다. 권선배의 말마따나 형님은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번으로 김영갑 기사를 7번째 쓴다. 그중에서 5번이 고(故) 김영갑(1957~2005)으로 시작한다. 그게 가장 아프다.



제주 속살 보듬은, 그의 체온을 느껴보다

김영갑(1957~2005)은 제주에서 20년을 꼬박 살았다. 1985년 섬으로 들어와 2005년 섬에서 갔다. 그는 고집스레 제주의 속살을 필름에 담았다. 파란 하늘보다 흐린 하늘이, 곱게 핀 꽃보다 왠지 슬픈 모습의 오름이 그의 사진에 더 많이 있는 까닭이다. 이번에 내려갔을 때도 제주엔 내내 비가 내렸다. 그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생전의 김영갑이 사랑했던 그 제주 풍경이다.

1.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성지가 된 갤러리.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2001년 루게릭병 판정을 받은 김영갑이 2002년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를 장기 임대해 사진 갤러리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2005년 김영갑이 황망히 떠난 뒤 박훈일 관장이 공사가 덜 끝난 두모악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갤러리 부지 면적은 4000평, 전시 공간은 300평. 20만 장이 넘는다는 김영갑의 작품 중에서 100여 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옛 운동장은 제주 중산간 지역처럼 꾸며져 있다. 지난해 7만 명이 갤러리를 방문했다.

제주 올레 3코스가 두모악을 통과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5월 현재 300㎞가 훨씬 넘는 올레 코스 중에서 유일하게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곳이 두모악”이라고 말했다. 갤러리 정문에서 왼쪽으로 5m쯤 옆에 벼락 맞은 감나무가 서 있다. 그 나무 아래 가루가 된 김영갑이 잠들어 있다. 생전의 김영갑을 기억하는 방문자가 담배 한 개비 불 붙여 내려놓는 곳이다. 입장료 3000원. 064-784-9906, www.dumoak.co.kr.

2. 오름

김영갑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주도에 정착한 초기, 그는 제주의 풍물을 담는 데 주력했다. 해녀와 굿판이 김영갑 초기 작품에 자주 보이는 까닭이다. 90년대부터 그는 제주의 풍광에 빠져든다. 장소로 구분하면 크게 세 개를 들 수 있는데, 하나가 마라도다. 김영갑의 마라도 작업은 그의 첫 작품집 『마라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장소라면 바다다. 그러나 김영갑의 바다는 푸르고 시원한 바다가 아니다. 비 맞고 눈맞고 바람맞는, 심란한 바다다. 마지막 장소가 중산간이다. 돌담 쌓은 밀밭 사이 오름 삐죽이 서 있는 중산간에서 김영갑은 들판의 당근 씹어먹으며 작업을 했다.

그가 유난히 사랑했던 오름이 있다. 용눈이오름. 용이 누워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용눈이오름의 매끈한 곡선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딴판으로 보이는 모습이 김영갑의 눈길을 붙들었다. 소지섭이 사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카메라 CF가 있는데, 이 사진이 김영갑이 용눈이오름 근처에서 작업했던 작품이다. 용눈이오름은, 어느새 오름 트레킹의 대표 코스가 돼 버렸다. 이정표도 잘 돼 있고 탐방로도 새로 냈다.

지금 두모악은 야트막한 언덕 양쪽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는 작품을 여럿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가 구름언덕이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김영갑이 가고 난 뒤 박 관장이 이름을 붙였다. 용눈이오름에서 8㎞쯤 떨어져 있다. 이 밖에도 다랑쉬오름·아끈다랑쉬·손자오름도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데 모두 동제주 중산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1 다랑쉬오름 옆에 아끈다랑쉬라 불리는 작은 알오름이 있다. ‘다랑쉬 앞의’ 또는 ‘작은 다랑쉬’란 뜻의 제주 방언이다. 생전의 김영갑이 유난히 아꼈던 오브제 중 하나다. 2 중산간 지역을 헤매다 만난 초원. 초원이 주인공이 아니라 바람이 주인공이다. 3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4 생전의 김영갑이 좋아했던 비자림 앞 매점의 커피 자판기.

3. 추억과 인연

몸이 성했던 김영갑이 버릇처럼 찾았던 곳이 있다. 김영갑은 온종일 중산간에서 헤매다 비자림 입구까지 가서 자동판매기 커피를 마시곤 했다. 김영갑은 그 커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고 불렀다. 지금도 비자림 입구 매점에 그 자판기가 있다. 김영갑이 가장 맛있는 돼지고기 집이라고 인정했던 곳은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나목도식당(064-787-1202)이다. 동네 할머니가 동네 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허름한 식당이다. 하나 돼지고기는 마을에서 잡은 신선한 것이 올라온다. 삼겹살 7000원.

생전의 김영갑이 고마운 후배라며 소개해준 사람이 있다. 2005년 조천읍 북촌리에 돌하르방공원을 연 김남흥(43) 원장이다. 두모악 정원에 있는 수많은 돌 조각이 김 원장 작품이다. 김 원장 역시 “아픈 육신 돌보지 않고 갤러리 꾸리는 형님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직접 둘러보면 여느 되바라진 관광지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돌하르방의 원형을 가장 잘 구현한 공원이라는 평을 듣는다. 입장료 4000원. 064-782-0570, www.dolharbang park.com.

4. 5주기

29일 5주기를 맞춰 여러 뜻 깊은 일이 준비됐다. 우선 책 두 권이 나온다. 하나는 김영갑을 기억하는 20명이 쓴 추모 에세이 『김영갑』(휴먼앤북스)이다. 김영갑의 미발표 작품 69점과 이생진(시인)·양인자(작사가)·차병직(변호사)·이동원(가수) 등이 추억하는 김영갑과 두모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필자 20명의 인세는 두모악 후원금으로 기증된다. 다른 한 권은, 이생진의 시와 김영갑의 사진을 엮은 시화집 『숲속의 사랑』(우리글)이다. 97년 출간했던 책을 이번에 새로 찍었다. 두모악에서 다음 달 29일까지 시화집에 실린 사진을 전시한다.

추모 행사도 있다. 29일 오후 5시 갤러리 잔디마당에서 ‘갤러리 음악회’가 열린다. 소프라노 박현주, 테너 현행복 등이 제주교향악단과 합주한다. 음악회에서는 김희갑 작곡·양인자 작사의 ‘김영갑씨’란 노래가 가수 김진권의 목소리로 처음 공개된다.

30일엔 ‘내가 본 이어도-김영갑 선생의 자취를 따라’란 답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김영갑이 사랑했던 풍경을 찾아 떠나는 행사로 이번 답사가 6번째다. 30일엔 아끈다람쉬를 오른다. 참가비 1만원. 두모악 건너편 감귤 창고를 갤러리로 개조한 ‘곳간·쉼’에서는 박훈일 관장의 사진전 ‘바다’가 다음 달 20일까지 열린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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