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류들의 24시] 1. 미국 국회의원 톰 데이비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경쟁력의 요체는 사람이다. 각 분야에서 일류가 모인 사회는 일류의 경쟁력을 갖춘 일류사회다. 정치인이 일류고, 공직자가 일류고, 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류인 사회, 이는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의 일류 선진사회다.

하지만 일류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각과 노력과 제도적 뒷받침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시급한 일류의 조건과 방향을 세계 일류 직업인들에 대한 특파원 밀착취재를 통해 제시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회의사당 옆 캐넌 빌딩 306호. 공화당 중진인 톰 데이비스 하원의원(버지니아.4선.52세)의 사무실이다. 연말 휴회를 며칠 앞둔 지난해 12월 19일 오전,기자의 '미 의원 경쟁력 연구'는 사무실 '검색'(?)에서 출발했다.

데이비스 의원을 제외한 방 식구는 모두 8명. 아버지가 한국인인 비서실장 피터 서와 여비서 2명을 빼고는 5명이 모두 입법보좌관이다. 책상마다 책과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다. 수험생들 같다.

수석 입법보좌관인 데이비드 머린은 "입법보좌관들은 외교.국방.경제.통상.정보기술(IT).사법 등 전문 분야별로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보좌진이 많다"고 말을 꺼내자 "지역구 사무실에 9명이 더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머린은 "하원의원은 매년 사무실과 보좌관 유지비로 1백만달러를 정부에서 지원받는다"고 밝히고, "보좌관 수는 의원 재량"이라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입법보좌관이 5명씩이나 필요한 걸까. 머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지난 2년간 데이비스 의원은 단독으로 30건, 공동으로 1백98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이 정도면 5명으로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데이비스 의원의 트레이드 마크는 IT 분야다. 그는 세계적인 기술자문회사 PRC의 부사장을 포함해 15년간 IT 분야에서 일했다. 데이비스 의원은 1999년 5월 기업의 컴퓨터 2000년도 인식 오류문제(Y2K) 해결을 지원하는 법을 만든 공로로 이듬해 미국전자협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요즘 그가 주력하고 있는 법안은 정부개혁위에 올라가 있는 '디지털 기술인력법'이다. 정부의 부족한 첨단 기술인력을 보강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 사이의 인력교류를 촉진하는 법안이다.

데이비스 의원은 입법보좌관들과 열띤 정책토론을 벌이며 하나씩 법안의 줄기를 잡아나갔다. 보좌관들은 샅샅이 자료를 뒤졌다. 의회 지원기구인 회계감사원(GAO)이 지난해 1월 펴낸 자료에서 정부 기술인력의 50%가 2005년이 되면 은퇴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세계적인 경영자문 회사인 KPMG의 보고서가 입수됐고, 지난해 7월에 나온 에너지부 감사보고서와 공공정책학회 연구가 증거자료로 추가됐다.

정부개혁위 기술.조달 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데이비스 의원은 지난해 7월 말 보좌관들이 챙겨준 자료로 무장하고 공청회를 이끌었다. 현재 이 법안에는 수십명의 동료 의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하고 있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 데이비스 의원이 나타났다."표결이 지연되는 바람에 늦었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공화당 하원 전국위원회(NRCC)위원장으로 당내 서열 5위다.

"주요 당직을 맡아 바쁠텐데 표결엔 얼마나 자주 참석하나."

"보통 99% 참가하지만 올해는 98% 정도였다. 백악관이나 시내에서 열리는 회의가 잦다 보니 불가피하게 빠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별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이다.

"통치력은 법을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고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설파했다. 미 의원들은 그만큼 입법활동을 중시한다는 얘기다. 데이비스 의원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당무와 입법, 지역구 활동 중 어디에 가장 역점을 두나."

말할 필요없이 입법활동이라고 대답한 그의 장광설이 이어진다.

"의원은 법을 만들고, 고치고, 나쁜 법을 막기 위해 선출된 사람이다. 당 지도부 일도 중요하고, 지역 주민을 만나 상호 교감을 유지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 두가지는 어디까지나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부수적 활동일 뿐이다."

미 의회는 입법 생산성에서 세계 초일류급이다. 2000년 한해 동안 상원의원 1백명과 하원의원 4백35명이 3천4백54건의 법안을 발의했고 이중 4백31개가 법으로 채택됐다. 명예직인 상원의원(7백4명)은 제쳐두더라도 하원의원만 6백59명에 달하는 영국 의회는 2000~2001년 회기 중 98건의 법안을 발의해 21개의 법을 만들었을 뿐이다. 나라마다 입법 체계가 달라 단순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미 의회는 그때 그때 필요한 법을 신속히 만들어 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미 의회 생산성의 핵심은 입법 근로자인 의원이다. 병사가 소총을 움켜쥐듯 그들은 입법에 매달린다. 입법은 그들의 특권이자 의무다.

미 의회에는 당 노선에 상관없이 의원 개인의 소신과 자율적 판단에 따라 표를 던지는 자유투표(크로스 보팅)가 정착돼 있다. 입법 자율권을 보장함으로써 의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이를 통해 입법 생산성을 유지한다는 발상이다. 그래도 주요 당직자인 데이비스 의원에게 크로스 보팅은 좀 무리가 아닐까.

"크로스 보팅에 심리적 부담을 느낀 적은 없나."

"당의 입장에서야 물론 기분이 나쁘겠지만 버지니아의 유권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내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나를 뽑아주는 것은 지역 주민이지 당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공화당은 알래스카 야생동물 보호구역 내 유전개발을 포함한 종합 에너지법안을 제출했다. 환경보호를 내세워 민주당은 반대했다. 데이비스 의원은 민주당 쪽에 선 공화당 의원 34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공화당의 전통적 노선을 저버리고 총기규제 강화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적도 있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