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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7>‘순이 삼촌’의 수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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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 10면

제주도 출신 문인들에게 ‘4·3사건’은 영원한 주제이자 숙제일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시작돼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3만 명 가까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연관돼 있지 않은 제주도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 사건을 문학적 주제로 삼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공안 당국은 작품 속에서 사건이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4·3사건’은 대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스쳐 지나가거나 변죽을 울리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의 데뷔작인 ‘아버지’도 그랬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인 이 작품도 ‘4·3사건’이 배경으로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사건을 겪은 한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는 데서 그치고 있었다. 소설 속의 소년은 아마도 열 살 안팎에 ‘4·3사건’을 겪었을 현기영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등단 이후 보다 본격적인 ‘4·3사건’ 주제의 소설을 쓰기 위한 전주곡인 셈이었다. 현기영은 70년대 중ㆍ후반에 걸쳐 ‘도령마을의 까마귀’ ‘해룡(海龍) 이야기’ ‘순이 삼촌’ 등 ‘4·3사건’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발표한 뒤 70년대 막바지 이들을 묶어 ‘순이 삼촌’이라는 처녀 창작집을 내게 되는 것이다.

41년 제주읍에서 멀리 떨어진 함박이굴 마을 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현기영은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선배 작가인 현길언과 함께 문학 서클에 가입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서울대 사대에 진학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정식으로 등단한 것은 다소 늦은 30대 중반이었다. 그 이후 그의 작품들은 발표될 때마다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끌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아직도 한을 풀지 못한 채 땅에 묻혀 있는 제주도의 원혼들을 달래는 진혼굿’이라는 평가였다.

첫 창작집 ‘순이 삼촌’이 출간된 것은 ‘10·26사태’로 나라가 온통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79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로부터 약 열흘 후인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서울 명동 YWCA회관에서는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재야단체와 제적 학생 등 천여 명이 모여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였다. 현기영은 이 집회에 창작집 몇 권을 들고 참석했다. 몇몇 지인과 후배들에게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날 집회는 경찰 진압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100명 가까운 참석자들이 연행돼 갔고, 현기영은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26일 월요일 아침 재직 중이던 서울사대부고에 출근한 현기영은 연행돼 간 집회 참석자 가운데 자신이 주도하던 친목회의 한 후배가 끼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네 명이 수배자 명단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 중이던 교실에 경찰이 들이닥쳐 현기영을 중부경찰서로 연행했다. 며칠 뒤 현기영은 합동수사본부 요원에게 인계돼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2박3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현기영이 주도하던 친목회의 성격을 따져 물었으나 곧 ‘순이 삼촌’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현기영은 그때의 체험을 후에 이렇게 썼다.

‘첫날은 몽둥이로 전신을 난타 당하고 이튿날은 그 멍들고 부은 몸뚱이 위 군복을 벗기고서 내복 위로 싸릿대 가지를 후려치면서 내 몸 마디마디를 자근자근 후려갈겼다. 싸릿대로 손등을 맞기도 했는데 손톱이 터져 끈끈한 피가 엉겨 붙기도 했다. 셋째 날은 어느 방에 불려가 다수의 수사요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구둣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렇다 할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한 채 다시 남부경찰서로 인계된 현기영은 집시법 위반죄로 20일간 유치장에서 머문 뒤 풀려나게 되지만 ‘순이 삼촌’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듬해인 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의 후유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던 8월 21일 현기영은 또다시 학교 수업 중 경찰서의 대공과로 연행돼 갔다. 이미 얼마 전부터 당국이 ‘순이 삼촌’을 다시금 문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현기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몸이 야윌 대로 야위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더라도 4박5일에 걸친 수사관들의 집요한 신문 공세는 그 자체가 정신적인 고문이었다고 현기영은 술회했다.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경찰의 요청으로 ‘순이 삼촌’은 판매금지조치됐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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