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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출판계 새 흐름… 40대가 쓰고 40대가 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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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올해 출판계의 명암을 진단하고 내년 독서시장을 어떻게 활성화해 나갈지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지난 7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소장 한기호)에서는 출판 관계자 여섯 명이 모여 6시간30분동안 마라톤 회의를 하며 올해의 출판동향을 점검했다.

김학원(휴머니스트 대표).장은수(황금가지 편집장).이권우(도서평론가).김영범(북새통 대표).박철준(뜨인돌 기획실장)씨 등은 40대 독자층의 형성,자기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체의 인기,무게 있는 인문서의 속출,출판사의 시의성 있는 기획력 등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 40대가 생산자이자 구매자=토론자들은 무엇보다 대담집이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과, 40대층이 출판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구매자로 등장해 출판 활성화의 주력부대가 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기호씨는 편집자의 기획력이 돋보인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휴머니스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등을 예로 들면서, 이런 유의 책들이 앞으로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양과 동양이…』를 기획한 김학원씨는 "언론은 그간 386세대를 주시해왔지만 출판에선 40대가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독서와의 친화력을 유지해온 40대들이 자신의 농익은 이야기를 내놓아야 30대들이 귀를 기울이며 20대까지 연결되고, 또 바로 윗세대인 50.60대와의 고리가 형성돼 궁극적으로 출판의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구매력 있는 40대의 적극적 움직임은 올 출판계의 한 특징인 인문서의 활성화와도 연결된다. 『교양』(들녘).『씰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등 3만~5만원대의 무게 있는 인문서가 속출해 팔리고 있는 것이다.

이권우씨는 "인문서의 부활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으나 구매력 있는 386세대와 40대의 등장, 그리고 신문 북섹션과 방송의 책 소개에 힘입은 바 크다"면서, "다른 한편으론 실용적 지식과 오락성만 강조하던 분위기를 문화적으로 반성하는 기류의 확산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범씨는 "희소성 있는 책들에 독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일본의 이와나미나 고단샤 출판사처럼 문고본을 활성화시켜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고급 지식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출판사가 기획단계에서부터 하드커버.페이퍼백,그리고 문고본까지 연계해 제작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성으로 이어졌다.

◇ 논문체보다는 에세이체 인기=책의 서술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점도 놓쳐선 안된다. 장은수씨는 "과거엔 논문체가 지식 서술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원전을 읽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체의 글이 사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엔 지식인들이 전문가로서 상아탑 안에서 충분히 자신의 아성을 지킬 수 있었다면, 지금은 전문지식을 가진 교양인으로 자신의 생존방식을 바꾸면서 글쓰기 방식,말하기 방식까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기호씨는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개인의 체험이나 마음까지 읽어내는 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뜨인돌)의 성공 요인인 서사구조의 도입을 출판의 중요한 조류로 눈여겨 봐야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이 책을 기획한 박철준씨는 "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형으로서 서사 구조, 다시 말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용과 각종 캐릭터 등 형태의 다양화가 맞물려 종이책의 강점을 살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꾿빠이 이상』과 『알도와 떠도는 사원』=본격 문학과 순수 문학의 논쟁은 올해도 뜨거운 주제였다. 김학원씨는 "80년대 황석영이나 조세희씨의 소설이 본격 문학이라서 읽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읽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순수-대중 문학논쟁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소설 분야에서 주목을 끌 만하다고 언급된 책들은 국내 첫 취재형 소설인『꾿빠이 이상』(문학동네)과 지식소설의 전범을 보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론과실천)이었다. 장은수씨는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게 쓴 소설을 문단에서 소홀하게 대접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 9.11테러와 출판의 기동성='빨리빨리' 관행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도 논란거리였다. 우리 출판계가 빨리 만들어 내는 데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해당 사건에 대한 의미부여 등 해석력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는 결국 출판계가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돈벌이업자로 전락하는 길이라는 따끔한 자성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오히려 우리 출판계가 기동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를테면 교육문제나 마약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출판계의 응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우부도와 같은 일이 벌어져도 그를 심도있게 분석한 책이 없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 참석자는 "대우 사태에 대해서는 외국에서 연구하고 있을 테니까 외국에서 책이 나오면 그때 번역해 내면 될 것"이라고 말해 모두의 자조섞인 웃음을 자아냈다.

참석자들은 인문서 시장에서 최근 삼인.지호.새물결.이산.궁리.푸른역사 등 신진 출판사들이 자기 전문분야를 분명히 하면서 이제 생존단계를 넘어 선전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현상을 보이는 출판계에서 소규모 전문 출판사들이 마케팅이 뛰어난 거대 출판사들의 틈새를 잘 메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밀리언 셀러의 가능성, 신화 관련서의 붐, 실용서의 한계, 청소년책 부족과 아동서 과열 등을 놓고 토론은 밤깊은 줄 모르고 이어졌다.

배영대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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