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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 등돌리는 미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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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계기로 맺어진 미국과 파키스탄의 정략적 밀월관계가 불과 두달여 만에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선언하면서 탈레반 정권을 지원해온 파키스탄을 회유하고 압박해 공격 지원기지를 제공받았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으로선 국내 강경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5년지기 탈레반을 등지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3년째 파키스탄에 가해온 경제제재를 풀어주고, 10억달러의 무상원조로 화답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탈레반 붕괴로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미국이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달 말 파키스탄이 요청한 F-16기 28대의 인도를 거절했다. 또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의 최대 위협국인 인도에 조기 경보 레이더 시스템을 판매하는 것을 묵인했다. 나아가 미국은 9.11 테러 직후 중단했던 인도와의 군사협력 논의를 이달 들어 재개했다.

데니스 블레어 미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은 "양국의 군사협력 논의가 전례없이 강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인도 접근에 이어 북부동맹이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

북부동맹은 카불 입성 당시 파키스탄 대사관부터 불태울 정도로 파키스탄에 강한 적의를 품고 있다. 또 북부동맹은 인도와 가까운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 파키스탄에 우호적인 파슈툰족이 집권할 것으로 기대하고 미국을 지원한 결과 사방에 온통 적만 만든 꼴이다.

미국의 인도 접근은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간 세력 균형을 통해 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이용하다 가치가 없어지면 쉽게 버리는 미국의 '감탄고토(甘呑苦吐)'식 외교의 전형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미국 언론 일각에서는 미국이 이 기회에 무샤라프 정권을 제거하는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확전론자들 사이에 파키스탄이 전쟁 지원기지로서 효용가치를 다한 데다 이라크처럼 언젠가는 미국을 겨냥할 수 있는 핵보유국인 만큼 선제공격을 통해 전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미군이 바로 공격해올 거라는 소문이 파키스탄 사람들 사이에 나돌아 웬디 챔벌레인 파키스탄 주재 미대사가 지난 5일 공식 부인 성명을 냈을 정도다.

파키스탄 군부 내 원리주의 강경파들은 무샤라프 대통령의 미국 편들기가 파키스탄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처지로 만들었다며 연일 목소리를 높여 무샤라프의 입지를 흔들고 있다.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면 탈레반 못지 않은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파키스탄에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계속 파키스탄을 고립시킬 경우 무샤라프 대통령은 정권 유지를 위해 내년 10월까지 실시키로 한 총선을 연기하거나 카슈미르 분쟁을 격화시키는 무리수를 둘 우려도 있다.

또 미국이 인도에 접근할수록 파키스탄은 중국과 손잡고 두나라에 맞설 가능성이 커 핵무기 경쟁의 가속화가 예상된다. 이미 중국은 파키스탄에 핵미사일 기술을 전해주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미국의 감탄고토식 외교가 남아시아를 새로운 화약고로 만들 우려가 크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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