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관제 조사라서 인정할 수 없다”니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천안함 사태는 한국의 야당과 진보세력에게 중요한 시험이다. 야당과 진보세력은 국가안보 문제를 딜레마로 느끼는 것 같다. 안보는 여야를 뛰어넘는 초당적인 문제라는 당위(當爲)와 이른바 ‘북풍(北風)’의 피해라는 현실 사이에서 그들은 경계인처럼 서 있는 것이다. 북한으로부터의 국가안보적 위협인 북풍은 야당과 진보세력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87년 대선 때 북한의 대한항공 여객기 테러가 결과적으로 야권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1997년 안기부는 김대중 후보가 북한 자금을 받았다는 ‘북풍’을 조작했다. 한국의 야권은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북풍 피해의 경험을 갖고 있다.

야당이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고 ‘분단·대치국가의 야당’으로서 좌표를 확립하려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fact)을 존중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합리적인 대처를 주장해야 북풍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천안함 사태에 접근하는 야당의 태도는 잘못된 부분이 많다. 처음부터 “북한 소행 가능성은 낮다”고 해서 입지를 좁히더니 진실의 윤곽이 거의 드러난 지금도 비(非) 과학적인 궤도를 고집하고 있다.

어제만 해도 민주당의 ‘천안함 사건 진상규명특위 및 북풍저지 특위 위원장’인 김효석 의원은 “20일 예정된 정부의 발표는 관제(官製)조사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인정할 수 없다면 왜 자당(自黨) 몫 조사위원을 추천했는가. 조사위는 민간 전문가도 참여한 ‘민·군 합동’인데 무엇이 관제인가. 그리고 미국·호주·스웨덴의 전문가도 들어가 있는데 믿지 못한다고 하면 민주당은 국제사회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야권의 유시민 경기지사 단일후보는 지난 12일 “언론의 외부폭발 보도는 소설”이라고 했다. ‘외부폭발’은 조사위의 과학적인 잠정 결론인데도 소설이라고 매도했다. 그는 어제 또 “만일 북한이 개입돼 비극이 일어났다면 군 지휘관과 현 정권이 책임져야 될 문제”라고 말했다. ‘북한 개입’이란 경우를 상정하고도 북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정부에만 화살을 쏜 것이다. 이런 식의 경도된 인식과 뒤엉킨 스텝이 야권 스스로를 북풍 피해자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집권세력이 북풍을 조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야당과 진보세력이 스스로 북풍에 흔들리는 것인지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천안함 사태는 남북관계와 통일구도, 나아가 동북아의 미래와 관련해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북풍조작에 휘말리게 되면 한국인에게는 불행한 내부 분열이다. 정부·여당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가뜩이나 야권은 선거를 앞두고 북풍 영향을 우려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20일 조사 결과 발표에서 내용을 부풀리거나 근거가 희박한 사실관계를 주장해선 안 된다. 오히려 야권에서 제기하고 있는 각종 의문사항들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