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만신창이 수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지 만 12년째다. 수능 실시는 앞서 12년간 시행된 대학입학학력고사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였다. 교과서 위주로 출제된 학력고사는 과외 수요를 지나치게 유발해 학교 교육이 황폐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제시된 것이 교과서 중심이 아니고 암기식 학습법으로는 답안 작성이 쉽지 않은 통합 교과적인 유형의 문제인 수능이다.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날고뛰는 한국의 사교육업자들이 수능을 그냥 둘 리 있는가. 학원의 수능 공략법이 신출귀몰해지자 교실에서 배운 실력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반응과 선택이 어떠할 것인지는 불보듯 뻔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다시 사교육이 번창하고 공교육은 외면당하는 부작용이 만연하게 된다. 학생들은 학원에서 수능 수업을 받고, 학교는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는 더 없이 좋은 휴식처로 전락한다.

사교육을 잡을 요량이었다면 수능은 과외 없이도 학교 교육에 충실한 학생이면 얼마든지 풀이가 가능했어야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대학교육을 받는 데 필수적 능력인 사고력과 창의력을 측정한다는 초기 목표는 간 데 없고, 단편적 지식을 묻는 암기 위주의 공부방법이 효과적인 학력고사와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된다. 난이도가 해마다 들쭉날쭉해져 수험생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영역별 문항을 족집게처럼 알아맞힌다는 서울 강남의 유명 학원과 강사의 인기는 상한가를 친다.

급기야 수능 출제위원에 학원 강사가 포함되고 정답이 둘인 엉터리 문제까지 출제되는 상황에 이른다. 대학예비고사가 치러지던 1960년대 후반과 별 차이가 없는 출제 관행 때문이다. 시험 한달 전 출제위원과 검토위원을 선정하고 외부와 접촉을 막는 합숙 출제가 37년째 계속되고 있다. 경제 성장과 함께 달라진 교육 환경과는 동떨어진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대학입시를 위해 국가가 관장하는 시험의 성격과 명칭이 달라질 적마다 교육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교육부가 꼭 채택하겠다고 장담한 문제은행식 출제는 여전히 메아리다.

대학진학적성시험(SAT)을 출제하는 미국의 ETS는 전문인력만 1100여명이고 연간 예산이 6420억원이다. 영국의 AQA는 400여명에 1320억원, 일본의 대학입시센터는 100여명에 1010억원 규모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능 인력이 30여명, 예산은 고작 160여억원이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여건을 감안할 때 큰 탈 없이 출제하고 관리한 것이 기특할 정도다. 급조된 출제진이 콩볶듯 만들어낸 문제를 두고 학생간 실력 차이를 견줘볼 변별력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던 것이다. 교육부가 3년 후 새로운 수능은 일부 영역부터 폐쇄형 출제를 탈피해 문제은행식 체제로 전환한다니 지켜볼 일이다.

학생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졸속 출제라 하더라도 시험 관리는 완벽해야 할 것 아닌가. 지난주부터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수능 부정의 양태를 보면 기가 막힌다. 3년씩이나 같은 학생의 대리시험이 이어지고 정보통신 강국답게 휴대전화 커닝이 벌어진 것이다. 부정으로 상위권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학생이 있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은 없다. 부정을 고발하는 글이 인터넷에 게재되면 삭제하기 바빴던 교육청, 학생들의 커닝 모의를 눈감아준 고교, 부정 행위를 목격하고도 외면한 감독 교사, 예고된 부정의 방지에 소홀했던 교육부, 모두가 부정 사태의 주범이다. 커닝에 직접 가담한 학생들은 잘못된 수능체제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지난해는 출제 오류, 올해는 부정 행위, 내년은 혹시 문제 유출이라도…. 수능 전반에 대한 철저한 점검과 개선이 필요하다.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