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이야기꾼 - 무협 2.0 ⑧ 『천산도객』 작가 오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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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의 힘을 믿는 오채지 작가는 강호의 바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경빈 기자]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마침내 큰 바다에 이른다. 세상의 낮은 곳부터 보아라. 그곳에 네가 할 일이 있다.”

마도 종사 천제강이 정마(正魔)대전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자신의 비밀경호대장 용악산에게 이르는 말이다. 피의 복수를 다짐하던 용악산은 그 말에 따라 몸을 감춘다. 천산의 고원지대에서 우연히 비파랑이란 정파 무사를 만난 그는, 비파랑의 부탁에 따라 태중정혼녀에게 정표를 전해주러 항주 금룡관으로 가는데….

이야기의 힘을 믿는 작가 오채지(본명 장훈·38)의 『천산도객』은 이렇게 처연하게 시작된다. 마도 인물이 주인공인 무협소설은 적지 않지만(희한하게도 창작무협엔 위선적 정파와 소신 있는 마도 인사의 갈등구조가 많다), 이처럼 바닥에서 시작하는 스토리는 드물다. 그런데 그의 여섯 번째 무협소설인 이 작품에서 작가는 비로소 독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2006년 인터넷 무협사이트 ‘고무림(현 문피아)’에 『곤륜산맥』을 연재하며 데뷔했어요. 동료작가들은 『독룡하설산』『야왕쟁천록』 등을 좋아했는데 독자 반응은 별로였지요.”

그때 기억이 아팠는지 쓴웃음 짓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장르소설의 본질을 몰랐다고나 할까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느라 독자들이 바라는 재미의 언저리만 맴돌았던 것 같아요.”

일단 이런 각성을 하고 나자 출판사들이 반겼다. 줄거리를 꾸며내는 힘과 필력에 반해 계약을 희망하던 출판사들이 줄을 서던 터였다. 그렇게 나온 게 『천산도객』이다. 독자들도 갈수록 늘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영웅으로 떠오르는 과정이나 생생한 주변인물들의 캐릭터가 좋은 반응을 얻은 듯해요.”

그의 글쓰기는 독특하다. 꼼꼼하게 구상한 뒤 글을 쓰는 여느 작가와 달리 먼저 쓰고 나중에 고치는 스타일이다.

“보통 낮 12시에 일어나 하루에 9시간 정도 글을 씁니다. 책이나 다른 자료를 섭렵하고 나면 보통 새벽 3시쯤 잠에 들어요.”

이렇게 해서 한 달에 한 권 정도 쓰는데, 보름은 쓰고 나머지 보름은 퇴고하느라 보낸단다. 그런 필력의 바탕이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 나가 곧잘 상을 타곤 했지만 역시 책이겠지요. 독서광이라 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인데 순수문학보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등 재미가 있는 책들이 좋더라고요.”

경남 하동 출신으로 부산의 한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1998년 대학 졸업 후 직장도 다녀보고 피자가게도 운영해 봤지만 결국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특이하게도 데뷔작은 무협소설이 아니라 『타잉』이란 낚시소설이다.

“우연히 플라이낚시를 알게 되어 5년 간 자료조사 끝에 썼죠. 지구상에 하나만 남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원도에 각국의 낚시꾼들이 모여들며 벌어지는 이야기였죠.”

그는 ‘재미’의 힘을 믿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이치를 몇 마디 말로 압축할 수는 없지만 『천산도객』에선 ‘높은 곳에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메시지를 알리고자 했어요.”

그런 의도가 얼마나 먹혔는지 모르겠단다. 하지만 그의 앞날은 기대된다. 다섯 가지 빛깔을 낸다는 중국 쓰촨성의 호수 이름으로 필명을 정한 그는 필명처럼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내려 고심하기” 때문이다.

글=김성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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