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7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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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흥덕대왕 5년.

서력으로는 830년 5월.

늦은 밤. 경주의 남유택(南維宅)으로 달도 없는 어둠을 틈 타 남의 눈을 피해 한사람이 찾아왔다. 남유택이라면 반향사(反香寺)라는 절의 남쪽에 있는 대택으로 경주에 있는 금입택(金入宅)중의 하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전성 때에는 경주에 수많은 금입택이 있었다고 하는데, 금입택은 부유한 큰 집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모두 전통 깊은 신라의 명문귀족들이 살고 있던 저택들이었던 것이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의 후예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재매정택(財買井宅)을 비롯하여 35개의 금입택들이 경주성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유택도 대대로 명문가의 하나로 당시에는 흥덕대왕의 당제(堂弟)인 김균정(金均貞)과 그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살고 있던 집이었다.

김균정은 왕의 사촌이었고 따라서 그의 아들 김우징은 왕의 종질(從姪), 즉 사촌형제의 아들이었으니 흥덕대왕 재위시에는 제2의 권력서열을 갖고 있었던 막강한 세도가였던 것이었다.

물론 제1의 권력서열은 흥덕대왕의 친동생인 상대등(上大等) 김충공과 그의 아들인 김명(金明)이었다. 당시 신라의 조정에서는 대부분 상대등의 직책을 맡아오고 있던 사람들이 차기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아무도 흥덕대왕의 다음으로 왕의 아우인 김충공이 왕위에 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었다.

더욱이 흥덕대왕의 선왕들이었던 소성왕(昭聖王),헌덕왕(憲德王) 등은 한 형제들이었으므로 네 형제 중 막내인 김충공이 다음번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이 무렵 김균정은 아찬의 직책을 맡아오고 있었고,그의 아들 김우징은 시중이다. 시중은 상대등과는 달리 실제 행정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실무책임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캄캄한 한밤중에 당대 왕권세력의 제2인자였던 김균정의 금입택으로 남의 눈을 피해 한 사람이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찬 나으리."

숨어든 그 사내는 김균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문안인사부터 하였다.

김균정의 옆에는 그의 아들 김우징이 정좌하여 앉아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문안인사를 받은 후 김균정이 물어 말하였다.그러자 사내는 허리를 펴며 말하였다.

"중원(中原)에서 오는 길이나이다."

스무살이 갓 넘은 청년의 힘찬 목소리였다. 생김생김도 훤출하고, 훤한 장부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삼국사기』에도 그의 모습을 '태어나기를 영걸(英傑)하다'고 하였으니 사내는 출중한 용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참 자네는 중원의 대윤(大尹)으로 내려가 있었지."

깜박 잊었다는 듯 김균정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이 모든 것은 나으리의 은덕 때문이나이다. 백골이 난망이나이다."

청년은 다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사내는 고성(固城)의 태수(太守)로 있었던 것이었다. 비록 지방장관인 태수라 하더라도 고성은 강원도 변방의 한촌. 그 변방에서 태수 노릇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한직이었던 것이었다.

사내의 청원을 받아들여 고성의 태수에서 오늘날 충주인 중원의 대윤으로 영전시켜준 것이 바로 김균정이었으며 그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래 중원의 형편은 어떠하던가."

김균정은 자신이 힘써 중원의 대윤으로 보내준 것을 은근히 강조하면서 물어 말하였다.

원래 중원성은 고구려 땅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 때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에 이름을 고쳐 중원경으로 하였던 지방의 요새였던 것이다.

"고성에 비하면 교통의 왕래가 빈번하고 인총도 훨씬 많으나이다."

사내는 대답하였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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