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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중국경제 대장정] 중국 구조조정 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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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에서 구조조정 피하려고 중국에 온다고요? 꿈 깨십시오. 중국은 아예 구조조정 전쟁 중입니다. 13억 거대시장요? 그것도 구조조정부터 해놓아야 생각할 여유가 있지요."

톈진(天津)한국공단 대화기계전자의 송명석(宋明錫)총경리의 머리 속은 경비절감과 감량경영으로 꽉 차있다. 전자부품 제조공정 전체를 죄다 들춰본 뒤 별로 돈 안되겠다 싶은 단순조립은 다른 업체에 외주를 줬다. 원자재도 한국본사(제일엔지니어링)로부터 수입을 줄이고 가급적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다.

본사 매출이 다소 줄겠지만 중국법인이 흑자를 내고 살아남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한다. 공단의 다른 한국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국기업들만 실력이 모자라 고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롄(大連)의 도시바(東芝)는 3개월에 한번씩 경비삭감 대책회의를 연다. 모든 공정을 시시콜콜 뒤져 한푼이라도 헛되게 새나가는 돈을 막자는 취지다.

이 회사 마쓰우라 준이치(松浦純一)총경리는 "이제는 더 이상 절감할 곳이 없어 근본적인 혁신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깐깐한 일본기업이 이 정도라면 정말 최대한 절감한 것으로 봐도 된다.

또 다른 일본기업인 스타정밀과 다스콤은 중국 근로자들을 1년 계약직으로 쓰고 있다. 인건비가 일본의 10분의1에 불과한데도 회사실적을 봐가며 종업원수를 유연하게 조절하기 위해서다.

거대한 시장과 싼 임금을 보고 중국에 온 외국기업들이 왜 이렇게 아등바등할까. 대형슈퍼나 양판점을 한번만 찾아가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칭다오(靑島) 중심가에 있는 카르푸의 2층 가전매장에선 중국브랜드 컨카의 34인치 컬러TV를 2천9백60위안(약 45만원)에 팔고 있다. 그런데도 쇼핑객들은 연신 "구이(貴.비싸다)"라며 고개를 젓는다. 이미 다른 양판점의 여름세일에서 1천위안(약 15만원)도 안되는 25인치 컬러TV나 6백위안대의 21인치짜리에 눈이 익은 탓이다.

얼마전 우한(武漢)에선 창훙(長虹).캉자(康佳).TCL 등 3대 TV메이커가 TV를 ㎏당 30위안에 팔았다. 매장엔 '무게 52.5㎏의 29인치 평면TV,1천5백75위안(약 24만원)'이란 가격표가 나붙었다. 컬러TV가 건어물처럼 무게로 팔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경쟁 탓에 TV값은 지난 여름에만 20~35%나 떨어졌다.

에어컨.휴대전화도 마찬가지다.3년 전 모델에 따라 5천~6천위안하던 에릭슨의 휴대전화가 지금은 1천5백위안이다. 에어컨값도 지난해 이후 하이신(海信).러화(樂華) 등 후발업체들의 가격인하로 2천5백W급이 절반값인 1천5백위안대로 하락했다.

가격전쟁은 중국기업들이 시작했다. 정부의 각종 업종규제가 풀리면서 이른바 종합가전업체가 급속히 늘어난 탓이다. 과거 계획경제 시절 중국 정부는 성별로 가전업체를 1~2개씩 안배하고 업체별 생산품목을 지정해줬다. 예컨대 하이얼(海爾)은 냉장고,춘란(春蘭)은 에어컨, 창훙은 TV식으로 나눴다. 그러나 개혁.개방으로 이 틀이 무너져 너도나도 종합가전 메이커로 변신하는 바람에 공급이 넘쳐나게 됐다.

가격경쟁이 지나치다 보니 물건을 팔아도 남는 게 없다. 에어컨은 이윤율이 5% 미만이다. PC는 3년 전 1만위안짜리 한대 팔면 1천위안이 남았는데 지금은 50위안 남짓이다. TV는 서로 입조심 하고 있어 손해를 보는지 이익을 내는지 모른다.

가전에서 불기 시작한 가격인하 경쟁은 이제 전업종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심지어 서부개발이나 올림픽 특수로 짭짤한 재미를 볼 것 같은 건설업에서도 긴장감이 돌고 있다. 상하이의 국영건설사 중국건축 제6공정국의 장청차이(張成才)총경리는 중국건설시장을 "스님은 많은데 죽이 모자란다"고 비유했다. 신규공사가 많아도 대형 건설사가 2천여개나 돼 경쟁이 빡빡하다는 것이다. 그는 "내년 초께 건설업계에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몰아닥칠 것"이라며 "내부개혁을 먼저 하는 곳이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일본의 후지쓰(富士通)총연은 "1990년대 초 정부시책으로 이뤄진 사업확장이 결과적으로 과잉투자를 초래했으며 이는 중국 전체 제조업 공통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금도 제조업 중 가동률이 80%를 넘는 것은 36% 정도다.

중국기업들조차 구조조정에 내몰리는 상황이다 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은 스스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 적응 못해 지난해 도산하거나 철수한 외국기업이 상하이에만 1천1백39개사나 된다.

칭다오의 한 한국기업인은 "한국에서보다 더 강력한 구조조정을 할 자신이 있는 기업만 오라"며 "중국에 가면 뭔가 풀리겠거니 막연히 기대하는 기업에 중국은 '낙원' 아닌 '공동묘지'로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정재(경제연구소)

남윤호(도쿄 특파원)

양선희(산업부)

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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