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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과거시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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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선시대 22대 임금인 정조 24년 3월 21일, 과거(科擧)시험 1차격인 초시가 열렸다. 몰린 인원은 11만1838명. 다음날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하는 인일제 시험엔 10만3579명이 몰렸다. 이틀새 21만명이 운집한 것이다. 당시 한양성 안의 인구가 20만~30만명이었다니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의 3분의 2가 몰린 셈이다.

영조 15년의 알성시에 응시한 사람이 1만7000여명. 정조 24년 이후 61년 사이에 하루 응시자가 다섯 배나 급증한 것이다. 왜 이렇게 늘었을까.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계산에 따르면 과거시험의 문과에 합격해 갈 수 있는 벼슬은 500여 자리에 불과했다. 높은 벼슬에 올라가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기준으로 삼던 조선에서 인구 증가, 양반 위주의 신분질서 붕괴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시험장에 몰리는 사람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경쟁이 심하니 자연 부정행위가 고개를 들었다. 고전적 수법은 시험장에 책 숨겨 들어가기(협서.挾書). 광해군 시절 이수광(李光.1563~1628) 선생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드러내놓고 책을 반입해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 같았다"고 썼다. 이익 선생도 "협서 금지는 완전 붕괴됐다. 과장에서 글을 직접 짓는 사람은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했다.

이외에도 콧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의영고', 시험관과 응시자가 짜고 치는 '혁제', 합격자 이름을 바꿔치는 '절과', 답안지를 바꾸는 '환권', 대리시험인 '차술',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고반' 등 다양했다.

수능시험 휴대전화 부정행위 역시 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른 '첨단기법'일 뿐 행태는 그때나 같다. 시험장 밖에서 모범답안을 수험생에게 전달하는 수법은 이미 숙종 때 등장했다. 성균관 앞마을에서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 땅속의 노끈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노끈을 당겨보니 속 빈 대나무가 나왔고, 길게 연결된 대나무 대롱은 담 밑으로 과거장 안까지 연결돼 있었다. 안에서 시험지를 내보내면 밖에서 답안지를 만들어 들여보냈던 것이다. 휴대전화 부정의 원조인 셈이다. 시험이 입신의 도구로 인식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병리적 현상까지 그때를 답습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실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 선생은 '북학의(北學議)'에서 붕괴된 과거 실태를 "겸손해야 할 장소에서 강도질이나 전쟁터에서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구나"하고 개탄했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