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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원하는 새로운 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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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5년 전인 1989년 11월 유럽과 세계를 뒤흔들었던 '혁명'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당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40년간 지속된 유럽 분단 상황의 종식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로운 냉전 종식 때문에 상실한 많은 기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냉전 종식은 소련에서 일어난 혁명으로부터 시작됐다. 80년대 내가 도입한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같은 민주주의적 정책들은 무(無)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이는 50.60년대 니키타 흐루시초프 전 서기장과 이후 알렉세이 코시긴 전 총리의 개혁에서 싹텄다.

*** 페레스트로이카, 1950년대 싹터

사회주의를 '재탄생'시키려는 이 같은 노력은 예정돼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적잖다. 그러나 초기 개혁은 80.90년대 내가 추진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나는 대통령 재임 중 민주적인 분위기를 배양해야 했다. 우리는 군비 경쟁을 종식하고 동서 간에 갈등이 있는 분야들에 대해 대처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상징으로 유럽의 심장부에 계속 존재했었다. 89년 7월 헬무트 콜 총리와 대화할 때만 해도 독일의 분단이 끝날 시기가 됐다고 생각지 않았다. 물론 독일인들의 선택은 달랐다. 그들은 '장벽은 무너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스스로 역사를 창출했던 것이다. 동부와 중부 유럽은 신속히 이 뒤를 따랐고 그들도 스스로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맞았다.

당시 소련 대통령의 역할이란 '불개입'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남의 나라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내 나라를 개방시킬 순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이런 생각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소련 정부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중부와 동부 유럽이 평화롭게 주권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냉전 종식은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냉전에 따른 공포를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핵전쟁의 가능성은 당시 실존했었다. 군비 경쟁에만 3조달러가 쓰였다. 세계 빈곤 구제에 쓰였으면 큰 도움이 됐을 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전한 탈냉전 세계를 만들 기회를 놓쳤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치가 끝난 80년대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시기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구성원 간의 구체적 합의가 없었다. 결국 이후의 세계화는 아무런 조율 없이 진행됐다. 소련의 붕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러시아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미국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변화가 일어나자 러시아는 민주적이고 점진적인 변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공산주의 모델을 하룻밤 만에 미국식으로 바꿔버리는 방법으로 일을 추진했다. 이런 미국식 모델은 러시아에는 맞지 않았고 결국 러시아를 후퇴시켰다.

*** 미국 일방적 정책은 성공 못해

미국의 음모는 아니었지만 소련의 붕괴는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자신을 냉전의 승자로 인식했고, 승자가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새로운 미국 제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자신의 독선적 철학을 따르길 원한다. 불행히도 이 같은 오래된 사고는 해결 불가능한 위기상황을 낳고 있다. 국익보다 공통의 관심사로 특징지어진 세계화 시대에서는 이 같은 일방적 정책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 15년째인 현 세계는 어느 때보다 새로운 사고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 테러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지구촌 문명사회를 원하고 있다. 폭탄이나 특수작전만으로는 세상이 안전해질 수 없다. 테러를 양산하는 가난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89년 당시처럼 우리는 변화와 책임 있는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리=박현영 기자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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