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비정규직'법안의 겉과 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미국의 노동조합총연맹인 AFL-CIO에서는 가끔 멕시코 근로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지적하며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성명이 나온다. 명분은 노동조합이 미국 내에서 벗어나 제3세계 근로자의 지위 향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셈은 멕시코 근로자의 임금을 올림으로써 미국 기업들이 값싼 멕시코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을 막고 미국 근로자들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이는 멕시코 근로자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하는 그 어떤 이민법 개정에 대해서도 미국 노조가 결사 반대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제3세계 근로자 보호라는 구호는 미국 근로자의 이익 보호라는 실체를 가리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법안이 자신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또다시 총파업 등 집단행동에 나설 모양이다. 노동계는 지난 수년간의 집요한 노력 끝에 이른바 비정규직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계의 주장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의 절반이 넘으며, 정규직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면서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노동계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한지라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비정규직에 대해선 부정적 이미지만 떠오르는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정부의 입법안 역시 비정규직을 억제하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실은 비정규직 사용을 억제하고 임금을 높임으로써 정규직의 고임금과 '철밥통'을 유지하는 데 정규직 노조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면 어쩔 것인가. 노동조합이야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자 그런다 치고 그 결과 정작 보호돼야 할 비정규직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등 비정규직에만 피해가 돌아간다면 그래도 괜찮은 일인가.

예컨대 노동계의 주장을 반영해 정부 입법안은 계약직을 3년 이상 고용한 경우 해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과 계약직은 일의 성격이 다르며 서로 보완적이다. 이들을 어떤 자리에 얼마만큼 사용하는지는 기업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지 법이 지정해 줄 일은 아니다. 정기예금과 보통예금이 엄연히 성격이 다른데 3년 이상 잔고를 유지하는 보통예금의 경우 정기예금으로 전환하라고 한다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가.

문제는 무엇보다 이 같은 규제가 계약직 고용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일자리를 뺏을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지금 몇몇 기업에서는 사회협력 차원에서 비인기 스포츠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만일 법이 이렇게 될 경우 그 팀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선수로 뛸 동안 안정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계약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3년 뒤에 해고할 수 없다면 그들이 다른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므로 애초에 일자리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불합리한 규제로 계약직 일자리가 없어질 뿐 아니라 자칫 비인기 스포츠까지 없어질 판이다.

또한 법안은 파견근로자의 확산을 막는다고 3년을 사용한 뒤엔 3개월 동안 같은 자리에 파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제는 모두에게 피해만 줄 뿐이다. 기업은 일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근로자는 3개월을 놀든지 다시 이력서를 들고 새 직장을 찾아나서야 한다. 파견근로는 선진국에서는 청년실업 해결책으로 인정받는 대안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가 원하지 않는 이별을 강요하니 법이 청년실업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올바른 비정규 입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 부당한 차별을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고용조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선택에 맡기는 게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국회는 이익단체가 쓰고 있는 가면 속을 들여다보는 혜안을 갖기 바란다.

남성일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