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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9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98. 師叔 자운스님

성철 스님의 도반(道伴)을 말하자면 같은 해인사에 머물렀던 자운(慈雲)스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 스님은 해인사 부속 암자 중 가장 외진 곳인 백련암에 머물렀고, 자운 스님은 큰절 바로 왼쪽에 있는 홍제암에 오래 머물렀다. 두 스님은 해인사에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숙의해 방침을 일러주던 양대 거목이었다.

절집의 촌수로 따지자면 자운 스님은 성철 스님의 아저씨뻘, 즉 사숙(師叔)이 된다. 자운 스님은 3.1운동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이었던 용성(龍城)스님의 제자. 성철 스님은 용성 스님의 제자인 동산(東山)스님의 제자, 다시 말해 용성 스님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세속처럼 혈연관계에 따른 촌수는 아니지만 절집에서도 이런 식의 사제 관계에 따른 나름의 촌수가 엄연히 존재한다. 세속의 나이로는 자운 스님이 성철 스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어쨌든 촌수로는 아저씨뻘인 셈이다.

그러나 두 스님은 세속의 형제, 절집에서 말하는 사형사제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두 스님이 처음 만난 것은 금강산 마하연 선방이니 1940년. 자운 스님이 92년 입적할 때까지면 52년의 긴 인연이다. 자운 스님은 평생 지기(知己)로 지내면서 괄괄한 성철 스님의 성정을 잘 이해해주었다.

성철 스님과 같이 봉암사에서 살던 무렵 누구보다 앞장 서 고생을 감내한 것도 자운 스님이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 시절을 회고할 때면 늘 "부처님 가르침대로 탁발해서 공양하기로 했는데, 모두 어렵던 시절이라 탁발도 쉽지 않았제. 그 때 제일 많이 탁발을 다녔던 분이 자운 스님"이라고 말하곤 했다.

앞서 언급했듯 자운 스님은 성철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가사와 장삼의 모델로 삼을 보조국사의 옷을 보기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까지 다녀왔을뿐 아니라, 그 본을 따 현재 조계종 스님들이 입는 옷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운 스님은 이후에도 스님뿐 아니라 재가자들이 지켜야할 각종 계율을 정리, 조계종의 선풍(禪風)을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한 대율사(大律師)다.

자운 스님의 성품,성철 스님과의 우애를 말해주는 얘기로는 대구 파계사 부속 성전암 시절 일화가 유명하다. 하루는 자운 스님이 걸망에 원고뭉치를 잔뜩 지고는 칩거하던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운허 스님이 금강경을 번역한 원고네. 노스님께서 교정을 받고 싶으시다고 하니 한번 읽어줘야겠어."

성철 스님은 길게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우째 노스님 원고를 교정본다 말이고. 나는 못하니까 다시 싸 짊어지고 가소."

성철 스님을 잘 아는 자운 스님은 이런저런 다른 얘기를 하다가 원고를 다시 짊어지고 내려갔다. 그리고 몇 달 뒤, 자운 스님은 다시 그 원고를 지고 와 교정을 봐달라고 했다. 성철 스님은 다시 거절했다. 다시 몇 달 지나 세번째로 자운 스님이 원고를 들고 왔다.

"어른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에는 꼭 봐줘야겠네."

성철 스님이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니다. 또 거절하자 점잖은 자운 스님이 불같이 화를 내 성철 스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무심한 수좌라지만 내가 세 번이나 올라와 부탁하고, 또 노스님이 세 번이나 교정한 글을 한번 못봐주나. 인간의 도리상으로라도 어떻게 그렇게 거절할 수 있는가."

한참 후 성철 스님이 말했다.

"스님, 생각해 보소. 스님 말처럼 그 사이에 운허 스님께서 세 번이나 다시 교정하고 윤문하셨다는데 내가 더 손댈 것이 뭐 있소. 내가 손 대면 그게 바로 노스님에게 불경(不敬)하는 거 아인가요. 원고는 그만하면 됐으니 성을 푸소."

자운 스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아이구, 저 고집은 내가 언제 꺾어볼꼬?"

성철 스님은 이런 얘기를 해주면서 늘 "자운 스님은 그런 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신뢰가 있었기에 성철 스님은 성전암에 머물던 당시인 56년 해인사 주지로 추대되자 이를 거절하면서 자운 스님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자운 스님은 거꾸로 67년 "해인사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철 스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 경북 문경 김용사에 머물던 성철 스님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오게 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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