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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워런 버핏과 박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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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버핏 때문이었다. 문득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궁금해진 건. 예전엔 박현주도 버핏 같았다. 성공을 향한 열정, 시장을 보는 혜안, 공포를 두려워 않는 결단, 뛰어난 시장과의 소통 능력까지. 그도 고비 때마다 한국 경제를 진단하고 시장을 전망했다. 방법도 버핏처럼 다양했다. 신문 기고나 인터뷰는 물론 임직원에게 보낸 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2003년 시장이 곤두박질할 땐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만 주식을 사고 있다. 40년간 경제 개발의 과실을 외국인에 넘겨주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2006년 1월엔 임직원에게 보낸 편지엔 “한국시장은 여전히 저평가된 상태”라고 썼다. 당시는 11주 연속 오른 코스피지수가 1400을 돌파해 과열이 우려될 때였다. 시장은 그의 말에 반응했다. 주가는 더 올랐다.

좋은 종목을 보면 참지 못했다. 동네방네 추천하고 다녔다. 다른 회사 펀드매니저들에게까지 권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여의도 증권가도 그의 분석과 전망에 백기를 들었다. 나중엔 “박현주가 샀다”는 소문만 나도 주가가 뛸 정도였다. 그가 제안한 적립식 펀드는 이 땅에 펀드 열풍을 불렀다. 펀드 자본주의란 말이 익숙해진 것도 그의 공이다. 그즈음 미래에셋의 한 임원은 “미국에 버핏이 있다면 한국엔 박현주가 있다” 며 “국적과 부의 크기만 다를 뿐 두 사람은 본질이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입을 굳게 다문 지 2년이 넘었다. 그가 국내 언론과 가진 공식 인터뷰는 2007년 11월이 마지막이다. 지난달 말 오랜 침묵을 깨고 뉴욕에서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했지만 일방적으로 뉴욕시장 진출 계획을 밝힌 게 전부였다. 참석자들은 예전과 달리 그가 무척 조심스러워했다고 전했다.

그가 입을 다문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시장에선 인사이트 펀드 때문으로 짐작한다. 인사이트 펀드는 창립 10년을 맞아 미래에셋이 내놓은 야심작이다. 한 달 만에 4조원어치가 팔렸지만 때를 잘못 만났다. 출시 직후부터 곤두박질, 한때 원금을 60% 넘게 까먹었다. 많이 회복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이너스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명성만큼 큰 비난이 쏟아졌다. 몰빵펀드, 한탕주의, 수수료 착취…. 답답하고 분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하필 그때 세계 금융위기가 닥칠 줄 몰랐던 것에 대한 자괴감도 있었을 것이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그 모든 게 쌓여 박 회장의 입을 다물게 했다”고 말했다.

실수를 터놓는 것도 소통이다. 마켓리더의 의무이기도 하다. 버핏은 그렇게 했다. 1993년의 제화업체 덱스터 인수를 “가장 큰 실수”라고 고백했다. 가끔 격한 표현도 썼다. 에너지 가격이 떨어질지 모르고 2008년 정유업체 코노코필립스 지분을 늘렸다며 ‘멍청한 짓(dumb)’이라고 자책했다.

요즘 금융시장은 혼란의 극치다. 좀체 돈의 흐름이나 방향을 점치기 어렵다. 금리가 오른다 아니다, 주식을 살 때다 팔 때다, 사람마다 말이 다르다. 갈 곳 잃은 부동자금은 600조원을 넘어섰다. 어제 끝난 삼성생명 공모주 청약에 19조원이 넘는 돈이 몰린 것도 그래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숙수(熟手)요, 벤치마크다. 한번 실수했다고 언제까지 입다물고 살건가. 박현주의 침묵도 끝날 때가 됐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