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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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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좌파이론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착취가 없는 자본축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갈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되는 이유도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더 많은 착취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본가의 숫자는 점차 줄어드는 반면 무산계급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착취 통한 자본축적론'은 오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자본주의 국가가 대규모의 중산층을 생산해 내면서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이뤄나가자 좌파이론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레닌에 따르면 일부 자본주의 국가가 마르크스가 예견한 모순에 봉착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식민지를 철저하게 착취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국의 경영을 통해 자국 내의 노동자들 대신 식민지의 노동자들과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수출'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본축적은 물론 어느 정도의 분배정의도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0~70년대에 남미에서 개발돼 80년대 한국의 좌파들 사이에 유행한 종속이론 역시 '중심부'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변부'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주변부 국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착취만 당할 뿐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였다.

모든 좌파이론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된 이유는 산업자본주의가 얼마나 놀라운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 마르크스, 레닌, 종속이론가들이 예견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60년대 이후 30여년에 걸친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사는 좌파이론의 오류와 산업자본주의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60년대 초반부터 성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는 수많은 모순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 결과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 자본주의는 대규모의 중산층을 형성하면서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이룬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세계 공산주의 체제 붕괴는 한국 모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97년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한국의 좌파가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좌파이론가들은 IMF 사태가 자신들이 주장하던 자본주의의 모순 내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당연한 결과라고 진단했고 좌파 정치인들은 보수 집권층이 환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이후 한국 경제는 급속히 회복하면서 체제의 견실함을 증명하였지만 이미 '한국호'는 좌파에 의해 조정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경험과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신 재분배와 복지체제 구축에 정치와 정책의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참여정부는 마치 좌파이론이 맞았음을 증명하려 하는 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동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현 정부의 핵심에 포진해 있는 이론가들은 과거 자신들이 신봉했던 종속이론이 옳았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한국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 외환위기 이후 좌파 이론가 득세

한국의 좌파들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역설과 산업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착취를 통한 자본축적의 단계를 지난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분배정의는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는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자본가들이 마음껏 투자하고 외국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현 집권층의 사명이다. 만일 한국이 남미 국가들의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 때문이 아니고 오직 현 집권층의 정책 때문이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