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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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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45년 9월 27일 패장 히로히토(裕仁)일왕이 항복하기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찾았다. 긴장한 일왕은 맥아더가 준 담배를 물고 손이 떨려 불을 붙이지 못했다. 대신 불을 붙여준 맥아더가 옛날 얘기를 꺼냈다. 러.일전쟁 당시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도쿄를 찾았을 때다. 일본군에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병사들이 약을 제대로 안 먹어 걱정이라는 메이지 일왕의 고민을 듣고 아버지 맥아더가 "약 상자에 '모든 병사는 4시간마다 약을 먹어라'는 일왕의 명령문을 넣어두라"고 조언했다. 모든 병사가 빠짐없이 약을 챙겨 먹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날 만남으로 일왕은 살아났다. 맥아더는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알고 있었다. 일왕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머리를 숙였고 맥아더는 "일본 재건을 위해 일왕의 충고가 필요하다"고 화답했다. 맥아더는 "처음엔 일왕을 엄하게 다스리려 했는데, 만나서 그가 진정한 자유주의자임을 느끼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일왕의 속마음은 산속에 피난 가 있던 아들(아키히토)에게 보낸 아내(나가코)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많은 걱정을 하고 계시지만 일본은 다행히 아무 탈이 없게 됐다. …우리는 위대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발전을 기약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하자."

뒤이어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온 사람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총리였다. 맥아더는 "총리가 나를 찾아와 일본 국민은 전쟁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헌법 9조 전쟁포기 조항이다. 초안 작성을 맡았던 시데하라는 대신 천황제를 살려놓고 물러났다. 평화헌법을 공포한 후임자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총리. 요시다는 훗날 측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지금 일본엔 힘이 없네. 경제력을 갖출 시기야. 그러나 방위는 필요해. 방위에 쓸 돈은 없어. 그래서 미군에게 부탁했다고 생각하면 되네. …그렇지만 미군이 영원히 주둔하지는 않을 거야. 반드시 바뀔 때가 올 것이야."

마침내 그때가 왔나 보다. 자민당이 헌법 9조를 없애고 자위군(軍) 창설과 전쟁 수행을 허용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까지 노리고 있다. "일본은 일어선다, 조선 사람 조심하라"고 했던가.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