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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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지럽달까, 답답하달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요즘 어딜 가든 화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름 전 터진 미국 테러, 또 하나는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 . 화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와 파장이 크고, 그에 따른 궁금증도 많다는 뜻이겠지요.

하긴 포화는 예비돼 있건만 그 표적이 될 테러의 전모는 여전히 증거 부족 속에 오리무중이고, 이용호 게이트는 캐면 캘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번져갑니다. 그러니 화제가 될 수밖에요. 하지만 주워 들은 정보에 나름대로의 추측을 더해 봐도 실타래는 더욱 엉켜만 갑니다. 그러니 어지럽고 답답하지요.

***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후배

이럴 때 까짓것 세월에 맡겨버리고 딴 데로 시선을 돌려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세상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유행이 있어 여기에 끼어들지 못하면 물정 어두운, 나아가선 자칫 무책임한 사람쯤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화를 할 때도 그런 유행에 따르는 게 편할 수는 있겠지요. 일종의 '사회적 익숙함' 이랄까요.

헌데 그러다 보니 생활패턴마저 비슷비슷해져 간다는 거, 한번쯤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인터넷이나 휴대폰, 자동차와 피서여행, TV 연속극과 대박 터진 영화…. 따지고 보면 그런 '사회적 익숙함' 에 편승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바로 거기서 벗어나 보자는 겁니다. 익숙함과의 '결별' 은 현실이 가로막는다 해도, 익숙함으로부터의 '일탈' 정도는 해보자는 겁니다. 그리곤 세상 유행에서 조금쯤 비켜서보고요.

어제 아침,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후배를 만났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오는 길 어디서 주웠는지 손바닥 위에 밤톨처럼 생긴 마로니에 열매를 펴보이며 "뭔지 아세요" 하더라고요. 서울 한복판, 자전거와 마로니에 열매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보기 좋았습니다. 일탈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꿈꾸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 일이라도 '저질렀을 때' 제 가치가 생기는 것이지요.

여행만 해도 그렇습니다. 꼭 주말에, 이름난 관광지에 가야 좋은 여행 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쯤 주중에 월차휴가 내고 아이들 학교 보내지 말고 떠나보세요. 그랬다고 세상 결딴나는 거 아닙니다. 몸에 밴 '사회적 익숙함'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이 발목을 잡는 것이지요. 주말에도 차 안에서 시간 다 보내는 먼 데로 눈을 돌리기보다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세요.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이며 옛 자취, 아쉬운 대로 문화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곳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익숙함' 에 매몰돼 찾고 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인터넷 왕국이랍니다. 시대의 흐름에 앞서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온라인상의 인터넷 콘텐츠가 수천년 인류가 축적한 책문화를 덮을 수 있을까요. 인터넷 서핑도 물론 좋지만, 책에 묻혀보는 것도 그 이상 행복한 일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한유(韓愈)가 '마을 가까이 찾아온 서늘한 기운, 등불을 가까이 하기 맞춤한 계절이구나(新凉入郊墟 燈火稍可親)' 라고 읊었던 바로 가을 아닙니까.

가을 책읽기는 '사회적 익숙함' 아니냐고요.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지난해 집계인데요, 계절별로 매출액을 보니 9~11월 가을철이 전체의 20.7%로 가장 적게 나옵니다.

*** 인터넷과 TV를 끄고

물론 책을 사고 읽는 시기가 다를 수 있지만 가을 책읽기가 익숙함이었던 시절은 옛 얘기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젠 인터넷과 TV 스위치를 끄고 책을 당겨 읽는 것도 하나의 '일탈' 로서 자격이 생긴 셈이지요. 휴대폰 대신 편지쓰기야 말할 나위도 없고요.

이런 것들을 모두 열거할 수야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세상 유행에 따라가기 위해, '사회적 익숙함' 에서 벗어나기 싫어 타성적으로 해온 일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하나쯤은 벗어나보세요. 어지럼증과 답답함 대신 이 가을의 뜻이 새록새록 깊어지지 않을까요.

박태욱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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