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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용사의 진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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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04년 2월 9일 오전 제물포 앞바다에서 순양함 6척과 어뢰정 8척의 일본 함대가 불을 뿜었다. 항복을 거부한 러시아 함정 ‘카레예츠’호와 ‘바랴그’호를 향해서다. 러시아 수병들은 최후를 각오하고 항전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 러시아 함장은 스스로 급수용 판을 열어 바랴그호를 수장하고, 카레예츠호를 폭파한다. 함정이 전리품으로 일본군 손에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의 발발을 알린 제물포 해전이다(가스통 르루,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던 러시아 용사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들의 얘기가 교과서에 실렸고, 해군 생도들에겐 조국애의 상징이 됐다. 한·러 수교 이후 매년 전투해역에서 진혼(鎭魂) 의식이 치러지고, 2004년엔 인천에 러시아 수병 추모비가 건립됐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에도 수병의 넋을 향한 ‘진혼’은 멈출 줄 모른다.

싸움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은 인류 공통의 의례(儀禮)다. 해마다 10월이면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울돌목 앞에선 씻김굿이 벌어진다. 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조선 수군의 영혼을 불러내 위로하는 진혼 행사다. 6월에는 한국전쟁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 ‘비목(碑木)의 계곡’에서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는 진혼무(鎭魂舞)가 펼쳐진다. 19세기 말 북미 인디언 파이우트족도 망자(亡者)를 위한 진혼무를 행했다. 쓰러져간 병사들이 묻힌 땅에서 되살아나 부족이 황금기로 다시 돌아갈 것이란 믿음에서였다.

동서고금의 시인들은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던진 용사들을 영웅으로 기렸다.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전사자를 애도한 노래 또한 그러하다. ‘진실로 용감하고 또한 무예도 뛰어나며(誠旣勇兮又以武)/ 끝내 굳세고 강하니 능멸하지 못한다(終剛强兮不可凌)/ 육신은 이미 죽었어도 정신은 영험하니(身旣死兮神以靈)/ 그대 혼백이여, 귀신 가운데 영웅이다(子魂魄兮爲鬼雄)’(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천안함 46인 용사’의 전국 합동분향소에 추모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애도의 눈물은 천안함 용사들의 영혼을 달래는 온 국민의 진혼무요, 진혼곡이다.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46인의 영웅들은 국민 마음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제 부디 편히 잠드시라. 그리고 호국신(護國神)이 돼 조국의 바다를 끝까지 지켜주시라.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