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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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제2장 신라명신

그날 오후.

나는 미데라를 떠났다.

미데라가 소장하고 있는 비불 '신라명신좌상' 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그것으로 찾아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슌묘는 내게 미데라가 소장하고 있는 다른 유물을 한점 보여주었다.

그것은 도현(道玄)이 쓴 시였다. 엔친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신라승 도현이 엔친을 위해 써준 송별시(送別詩)였던 것이었다. 도현은 당시 신라승으로 일본의 다자이후(大宰府)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따라서 견당선에 승선해서 당나라로 유학 가는 일본 승려들과 견당사들의 모든 편의와 순례, 귀국, 재당 신라인들과의 연계 등 온갖 어려운 일들을 수행했던 유명한 스님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슌묘와 헤어졌다. 슌묘는 내게 점심공양을 하고 떠나라고 간곡히 말하였으나 나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 어디에도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던 신라명신상을 내게 직접 친견시켜준 것만으로도 나는 후의를 입은 셈이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슌묘는 내게 그 신라명신의 모습을 사진촬영 할 수 있는 특혜까지 허락하지 않았던가.

그보다도.

내가 서둘러 슌묘와 헤어진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슌묘가 말하였던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함이었다. 슌묘는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신라선신당 뒤쪽에 신라사부로의 무덤이 남아있고, 그의 아들 각의(覺義)가 건립하였던 금광원(金光院)의 절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신라사부로는 이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무덤을 선신당 근처에 자리잡을 만큼 신라명신을 숭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기왕 이곳에 온 이상 신라사부로의 무덤에 참배하고 돌아가리라 마음을 굳혔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슌묘에게 물어보았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신라사부로의 무덤이 어디에 있습니까. "

그러자 슌묘는 대답 대신 미데라에서 관람객에게 주는 팸플릿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가 내어준 팸플릿에는 미데라의 경내가 알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경내 오른쪽에 내가 찾는 신라사부로의 무덤이 다음과 같이 표기돼 있는 것을 보았다.

'新羅三郞義光墓'

위치를 확인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난 가을 내가 찾아갔던 대우왕자, 그러니까 홍문천왕(弘文天王)의 무덤과 가까운 위치에 신라사부로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대우왕자의 무덤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신라선신당, 바로 신라명신이 안치돼 있던 불당과는 더욱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지난 가을 한번 답사했던 그 길이라 나는 슌묘와 헤어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인왕문을 나서서 왼쪽 방향으로 꺾어 걷기 시작하였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인왕문 앞 주차장에는 벚꽃 구경을 온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들이 가득 차 있었고 식당가도 오후가 되자 더 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서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빠르게 좁은 행길을 따라 걸었다. 낮은 경사를 따라 형성된 수로 속을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맑은 물위로 떨어져 산화(散花)된 죽은 벚꽃의 꽃잎들이 점점이 박혀서 함께 흐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다가 소용돌이치는 공간에는 흰 꽃잎들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경내를 벗어나 지난 가을 한번 가본 적이 있는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내가 이처럼 슌묘와 헤어져서 점심까지 굶으며 서둘러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찾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라명신상을 보았을 때부터 내 머리 속은 헝클어진 서랍처럼 정리되어지지 않은 상념들이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정리하는 데 나는 감정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의 연(鳶)줄이 끊어져 내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나는 이처럼 서둘러 도망치듯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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