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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자칼과 라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img src=/photo/2001/09/14/091408-11.jpg vspace=5 hspace=5 align=right> "카를로스 자칼 이후 가장 교활하고 악질적인 테러리스트. "

미국 본토에서 테러가 일어난 직후 한 테러리즘 전문가가 CNN방송에 나와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이렇게 평했다.

1970, 80년대에 활동한 자칼(94년 체포)과 90년대 들어 악명을 떨치고 있는 빈 라덴, 두 '인간' 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성장 배경이나 훈련 과정, 잔혹한 성격 등의 면에서,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촌간 정도로 닮은 게 사실이다.

*** 부유한 집안 출신 닮은꼴

자칼은 베네수엘라의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수학한 엘리트였다.

빈 라덴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벌 집안 출신으로 한때 벤처기업과 거대한 농장까지 소유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아랍권 국가의 편에 서서 강대국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른 두 인간을 킬러로 키운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소련과 미국이었다. 자칼은 KGB 첩보원 양성소에서 훈련받고 팔레스타인해방전선에 가담했다.

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반군으로 참전한 빈 라덴을 지도한 것도 미국 정보기관이었다.

두 인간 모두 자신의 고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돌며 국제 테러를 자행한 점 역시 유사하다. 자칼은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 올림픽 선수를 저격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본부를 습격, 인질극을 벌였다.

빈 라덴은 수단과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근거지로 각종 테러를 배후 조종했다.

하지만 이런 유사점에도 두 인간의 테러 방식이나 규모는 무척 다르다. 자칼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혼자 설쳐대는 '람보' 의 실베스터 스탤런이라면, 빈 라덴은 '대부' 의 알 파치노라고나 할까.

자칼의 테러 유형은 귀신 같은 변장술과 총검술을 활용한 인질납치.요인암살.총기난사였다. 그가 수십 건의 테러로 살상한 사람은 80명 정도였다.

반면 빈 라덴의 방식은 자칼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조직적이며, 피해 규모 역시 크다.

그가 배후 조종한 98년 미 대사관 폭탄 테러, 한 건으로 2백여명이 숨지고 5천여명이 부상했다. 그는 자살특공대를 운용하고 원자력발전소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테러단체를 모아 일종의 '동맹' 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면) 그는 미국 본토 테러로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사상 최대의 항공테러를 저지른 셈이다. 20세기에 발생한 9백여건의 항공테러 희생자는 모두 합쳐 2천여명이었다.

특히 빈 라덴의 이번 범행은 기존의 테러 규율을 깬 것이다. 비행기를 납치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린 뒤 풀어주거나, 되도록 민간인의 희생을 줄여왔던 이전의 상식을 파괴했다.

납치한 민간항공기를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켜 테러리즘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 까지 벗어던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빈 라덴의 파격적 테러를 계기로 준(準)전쟁인 '슈퍼(super) 테러리즘' 이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한다.

대량 살상을 노려 대기업체.쇼핑센터 등을 표적으로 한 폭탄.항공 테러, 인터넷에 바이러스를 퍼뜨려 경제적 손실을 입히는 사이버테러, 독가스나 세균을 살포해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생화학 공격 등이 그것이다.

*** 복합적 테러대책 마련을

문제는 세계 각국이 자칼 식의 테러에만 대비해 왔다는 점이다. 미국의 델타포스, 독일의 대테러리스트 특공대, 우리의 707부대.경찰특공대 등의 특수부대가 인질납치.요인암살 같은 상황을 가정해 훈련해온 게 대테러 전략의 전부였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세계 각국은 모든 유형의 테러에 대비해 항공망.보안망.치안체계 등을 재점검하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 빈 라덴 식의 테러에 맞설 묘안을 짜낼 태세다.

우리도 국소적인 테러 진압이 아닌 복합적인 테러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자칼의 날' 은 가고 있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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